거문도 전쟁
1885월 4월 15일 거문도 앞바다에 불탄봉보다 높은 거대한 돛을 단 군함 세 척이 나타났다. 거문도 촌장과 주민들이 모두 선착장으로 나와 구경하고 처녀 무당 점례와 박수 칠석이 선창가에서 요상한 눈으로 군함들을 지켜봤다. 한 번도 서양군함을 본 적 없는 거문도 주민들은 조정에서 보낸 군함으로 생각하고 도내해로 들어오자 만세를 부르며 눈을 떼지 못했다. 배는 배가 분명 맞는데 거문도의 고깃배에 비하면 백배는 더 커 보였다.
도내해에 정박한 군함에서 작은 배로 옮겨 타고 상륙한 백여 명의 서양 사람들은 거문도 사람들이 처음 보는 인간들이었다. 희한하게 생긴 모습이 조선 사람이 아님은 분명했다. 모두 똑같은 검은 옷을 입고 모자를 쓰고 있었다. 키는 거문도 사람들보다 훨씬 크고 피부는 백자처럼 흰색이고 머리는 금불상처럼 금색이고 눈동자는 바다처럼 파란색이었다. 긴 총자루의 맨 꼭대기에는 소를 잡을 때 쓰는 커다란 식칼 같은 것이 꽂혀 있었다.
촌장과 주민들은 그들이 거문도 땅을 밟아도 저항하거나 대항하지 않았다. 다만 신기하게 바라보며 그들의 행동을 살폈다. 군인들도 거문도 사람들에게 해코지는 전혀 하지 않았다. 커다란 군함에서 거문도로 내려오기 시작한 군인들이 삼백 명 이상 되고 도내해에 정박한 군함에도 백오십여 명은 남아 있는 듯했다. 대장은 통역사를 앞세우고 촌장을 만나 회담하고 촌장이 거문도 주민들을 모아놓고 설명했다.
군함을 타고 온 사람들은 서양 영국에서 온 군인들이며 우리 거문도에 온 이유는 거문도와 제주도 사이를 통과하는 러시아와 일본, 중국, 미국, 프랑스 군함들을 통제하고 감시하라는 조선의 왕명을 받고 왔다고 합니다. 영국 군인들에게 협조하면 그들도 우리를 돕겠다고 했습니다. 왕명으로 온 사람들이니 사이좋게 지내야 할 것입니다.
거문도 사람들은 지엄한 왕명을 받고 영국 군인들이 왔다는 말에 그 누구도 토를 달지 않았다. 왕명을 거역하면 역적이 된다는 것은 거문도 주민들도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무당 점례와 박수 칠석은 보통 일이 아님을 직감했다. 영국 군인들은 총 한 방 쏘지 않고 거문도에 상륙해 제 나라 땅인 냥 불탄봉 꼭대기에 커다란 영국 국기를 가장 먼저 세웠다. 영국군은 조선의 조정에 보고하지 않고 청나라와 일본에 거문도 점령 사실을 통보했다. 조정에서는 까마득히 모르는 일이었다. 영국군이 조선 왕의 허락을 받았다는 것은 분명한 거짓말이었다.
해밀턴 대위는 상륙하기 전에 영국군 해군 장병들에게 어떤 경우에도 거문도 여자들을 겁탈하거나 희롱하기 말 것을 명령했다. 그는 모든 전쟁은 여자 때문에 벌어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해밀턴의 명령을 받은 영국 해군은 거문도에 상륙해 여자들을 피해 다녔다. 대위는 거문도 남자들을 군함으로 초대해 대포를 보여주고, 군함 구경도 시켜주고 담배와 초콜릿을 선물했다. 대위의 생각대로 병사들이 여자를 피해 다니면서 영국군과 거문도 주민들 사이에 아무런 마찰이 일어나지 않았다. 영국군은 사백오십여 명이고 거문도 주민은 천여 명이나 되었다. 영국군은 고도에 병사들 막사와 병영창고 짓는 일을 가장 먼저 시작했다.
해밀턴 대위가 주민들을 동원해 공사를 하자 섬사람들은 처음에는 주저하였으나 하루 일을 다녀온 사람들이 받아온 빵과 통조림을 보고, 다음 날은 너도나도 영국군 막사와 창고 공사에 나섰다. 해밀턴은 주민들과 빠르게 친밀감을 쌓았다. 그러나 촌장은 걱정이었다. 영국 해군이 온 다음부터 평화롭던 거문도에 곧 전쟁이라도 터질 듯 긴장감이 감돌았다. 영국군은 막사나 창고 공사와 다르게 서도 보로봉의 목넘이 공사에는 주민을 동원하지 않고 병사들만 참여했다.
무당 점례와 박수 칠석은 수월산에서 바다의 용왕 신에게 풍어굿을 진행하려 하였으나 영국군이 총을 들고 통행을 막아 그곳으로 갈 수가 없었다. 거문도 사람들은 풍어굿을 하지 못하면 고기는 다 잡았다고 난리치며 촌장에게 영국군 대장과 타협하고 올 것을 요구했다. 해밀턴 대위는 주민과의 마찰을 우려해 수월산에서 풍어굿을 열도록 허락했다. 하지만 거문도 주민들이 영국군을 몰아내려고 어떤 계획을 모의하는 것으로 생각한 대위는 영국 해군 이백여 명을 중무장시켜 풍어굿에 참석시켰다. 무당 점례는 거문도 주민의 일 년 풍어를 비는 만큼 수월산에서 성대하게 풍어굿을 열었다. 바다를 향해 커다란 제사상이 차려지고 무당 점례와 박수 칠석이 굿을 시작하자 주민들이 빙 둘러 앉고 영국군이 총을 들고 뒷줄에 도열했다. 촌장과 해밀턴 대위는 점례의 바로 앞에 자리 잡고 앉아 구경했다.
점례는 붉은 무당 옷으로 차려입고 깃털이 달린 모자를 썼다. 박수 칠석이 흰 옷을 입고 장구를 두드리며 장단을 맞췄다. 박수의 흥겨운 가락에 무당의 춤사위가 박자를 타기 시작하고 덩실덩실 춤을 추는 무당을 영국군은 모두 넋을 잃고 바라봤다. 그녀의 화려한 무당복은 병사들 눈을 사로잡고 해밀턴 대위는 점례의 역동적인 춤에 빠져들었다. 서양의 발레하고는 비교할 수 없는 격렬한 춤사위에 대위의 혼이 빠져나갔다.
칠석이 굿거리장단을 두드리자 점례가 비나리했다.
썰물에도 용왕이요, 날물에도 용왕이라.
남해바다 용왕님 우리 거문도 어선마다 만선하게 비옵니다.
거문도 바다를 지키는 이순신 장군님 덕택으로
빈 배로 나가 들어올 적에는 만선하게 하소서.
얼쑤얼쑤 얼쑤얼쑤 얼쑤얼쑤
해밀턴은 점례의 노래를 듣다 영국해군사관학교에서 귀가 닳도록 배운 이순신 장군 소리에 귀신에 흘린 듯 벌떡 일어났다. 세계 해전사에 빛나는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살라미스해전, 영국과 스페인이 벌인 칼레해전, 영국의 넬슨 제독이 프랑스와 스페인연합함대를 물리치고 나폴레옹을 몰락시킨 트라팔가해전 그리고 이순신이 일본의 함대를 물리친 한산도대첩이 영국 해군사관학교에서 배운 세계 4대 해전이었다.
해밀턴 대위은 그 중에서도 23전 23승을 거둔 이순신을 천하제일의 해군 명장으로 존경했다. 거문도 주민들이 이순신의 후예라는 말에 그는 지금까지 생각했던 미개하고 하찮은 섬사람들로만 여겼던 거문도 사람들에 대한 생각을 버리고 존경하는 이순신의 후예를 직접 만났다는 기쁨에 가슴이 벅찼다.
그는 새롭게 무당 점례를 바라봤다. 칠흑 같은 눈썹에 흑진주처럼 반짝이는 눈동자 그리고 두툼한 동백꽃처럼 붉은 입술이 매혹적이었다. 무당의 노래는 어느 오페라보다 생동감이 넘쳤다. 풍어굿이 막바지로 가면서 점례는 신들린 듯 굿판을 펄쩍펄쩍 뛰어다니고 그녀의 화려한 옷자락이 휘날릴 때마다 해밀턴은 태풍을 만난 범선처럼 가슴이 울렁거렸다. 무당이 작두를 타자 대위는 현기증을 일으켰고 병사들도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풍어굿이 끝나자 영국 해군 병사들은 모두 무당 사랑에 빠졌고, 해밀턴은 그녀의 춤사위와 노래에 반했다. 대위는 며칠 밤낮으로 잠을 못 이루고 고민 끝에 촌장과 무당 그리고 박수 칠석을 양국군 막사로 초대했다. 그들은 영국군 막사에 들어서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생전 보지도 못한 음식 수십 가지가 큰 그릇에 먹음직스럽게 담겨있었다. 어쩔 줄 모르는 셋 사람을 위해 대위가 직접 돌아다니며 접시에 음식을 조금씩 담아주었다. 연한 쇠고기가 입안에서 부드럽게 녹고 수제비처럼 생긴 국수를 고추장 같은 양념에 비벼 나온 음식은 맵지 않고 새콤달콤했다.
해밀턴이 스파게티라고 이름을 알려주었다.
-스 파 게 티!
그들도 대위의 입을 보며 천천히 따라했다.
-스 파 게 티!
해밀턴이 웃자 그들도 그냥 따라 웃었다. 대위는 점례의 입술을 바라보며 얼굴이 붉어졌다. 입술에 묻은 케첩을 보고 입술 닦는 시늉하고 냅킨을 건네주었다. 그녀가 알아듣고 입술을 닦으며 대위를 바라봤다. 대위가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이며 말했다.
-오케이!
세 사람 모두 해밀턴을 띠라 외쳤다.
-오케이!
그들은 생전 처음 서양음식을 맛보고 감탄하며 대위에게 연신 고개를 숙였다. 식사가 끝나자 손잡이가 달린 그릇에 검은 숭늉을 병사들이 따라 왔다. 촌장이 먼저 맛을 보고 급히 잔을 내려놓았다.
-뭐가 이렇게 쓰당가 마시지 말어!
촌장이 침을 뱉으며 손사래쳤다.
-우리를 죽일라고 독약을 탔당께!
점례와 칠석이 깜짝 놀라며 벌떡 일어섰다. 그들을 보며 해밀턴이 웃으며 하얀 덩어리 두 개를 집어넣고 애기 손가락만 한 수저로 휘휘 저어서 천천히 마시며 커피잔을 세 사람 코 밑으로 빙 돌리며 말했다.
-커피!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점례의 커피잔에 설탕 두 개를 집어넣고 스푼으로 저어주며 마시라고 손짓했다. 촌장과 칠석이 만류하였으나 그녀는 대위를 믿고 쭉 마셨다. 씁쓸하고 달달한 맛이 희한했다. 커피를 마시고 점례가 죽지 않자 촌장과 칠석도 설탕 두 개씩 넣고 해밀턴이 했던 대로 스푼으로 휘휘 저어 한 모금씩 마시고 감탄했다.
-웨메! 시상에 이런 맛도 있당가?
대위는 그들의 표정을 보고 엄지를 세워 보이고 식사가 끝나자 막사 구경을 시켜주었다. 병사들 막사가 여러 동 있고 수백 명의 병사들이 분주히 왔다 갔다 했다. 훈련받는 병사들 구령소리가 우렁차게 고도와 동도, 서도에 울려 퍼지고 기합 소리에 놀란 갈매기들이 물을 차고 날아올라 기와집몰랑을 넘어 날아갔다.
다음으로 해밀턴은 테니스장을 구경시켜주었다. 병사들이 그물을 가운데 두고 공을 잠자리채 같은 걸로 주고받으며 놀았다. 대위는 촌장에게 테니스채를 쥐어주며 반대편에 세우고 테니스공을 살짝 쳐주었다. 촌장이 힘껏 테니스채를 휘둘렀지만 허탕질만 했다. 다음은 칠석에게 테니스공을 받아보도록 하였다. 칠석은 해밀턴이 넘겨준 공을 힘껏 쳐 넘겨 멀리 날아가 바다에 떨어졌다. 모두 크게 웃으며 즐거워했다.
해밀턴은 다시 당구장 막사로 그들을 데리고 갔다. 당구장에는 몇몇 병사가 당구를 치고 있었다. 대위는 당구대 하나를 차지하고 먼저 시범을 보이고 점례에게 큐대를 주며 한번 쳐보라고 하였다. 그녀는 해밀턴이 한 대로 당구대 위에 손을 받치고 손가락 사이로 큐대를 끼워 당구공을 뚝 쳐 보았다. 그러나 빗맞으며 당구공이 픽 헛돌았다.
해밀턴이 점례의 뒤로가 엉덩이를 쭉 빼고 엎드려 있는 그녀를 뒤에서 껴안고 당구치는 법을 설명했다. 해밀턴은 몸을 밀착하고 점례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어쩌지 못하고 여장승처럼 굳어버렸다. 대위를 바라본 촌장과 칠석이 달려가 그를 밀쳐내며 버럭 화를 냈다. 동방예의지국에서 남정네가 여인을 껴안고 손을 잡는 것만으로도 쳐 죽일 일이었다. 촌장과 칠석은 씩씩거리며 점례를 감쌌다. 당황한 해밀턴은 자기의 실수임을 깨달았다. 점례는 동백꽃보다 붉어진 얼굴로 부끄러워 어찌할 줄을 몰랐다. 촌장과 칠석은 그녀를 내몰다시피 당구장 막사를 빠져나왔다. 대위는 멋쩍은 듯 두어 발자국 떨어져 뒤를 따랐다. 촌장과 칠석에게 둘러싸여 걸어가면서 점례는 뒤돌아보고 해밀턴과 눈이 마주치자 살짝 미소를 지어보였다. 막사 앞 연병장에서 영국 해군들이 축구하고 있었다. 해밀턴은 촌장과 칠석을 막아서며 말했다.
-우리 거문도 주민과 영국 해군 간 국가대항전 축구 한 번 해요?
촌장이 대답했다.
-좋소. 우리도 축구는 자신 있응께!
칠석이 나서며 물었다.
-내기는 뭘로 한다요?
대위가 대답했다.
-영국 해군이 이기면 연병장에서 굿 한 번 더 보여주세요?
촌장이 점례를 바라보자 고개를 끄덕였다.
칠석이 나서며 소리쳤다
-그건 안 되지라우. 또 이 숭악한 놈들이 우리 점례에게 뭔 짓을 할지 모른 당께요.
그녀가 해밀턴을 보며 대답했다.
-그렇게 할라우.
칠석이 대위에게 삿대질하며 물었다.
-우리 거문도 사람들이 이기면 영국군이 거문도를 떠날 것이 당가?
해밀턴이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촌장과 칠석은 자존심이 무너졌다. 절대 영국군은 거문도 주민들에게 질 일이 없다는 듯 비웃는 해밀턴의 태도가 영 마음에 안 들었다. 아무튼 영국 해군과 거문도 주민들의 축구시합이 결정되었다.
일주일 후에 있을 시합을 위해 촌장과 칠석은 온힘을 다했다. 점례를 영국 군인들에게 빼앗길 수는 없었다. 축구시합에서 꼭 이겨 병사들을 몰아내고 싶었다. 무당 점례를 은근히 사랑하는 박수 칠석은 애가 타도록 적극적으로 뛰어다니며 시합을 준비하고 촌장은 동네 청년들 중 열한 명을 뽑아 맹훈련에 돌입했다. 하지만 영국군은 축구시합 연습은 하지 않고 점례를 불러들여 성주풀이 굿 준비를 도우며 축구시합이 끝나면 바로 굿판이 벌어지도록 만반의 준비했다. 대위는 점례를 보기 위해 틈만 나면 이 핑계 저 핑계로 무당을 찾고 그녀를 따라 많은 거문도 처녀들이 영국군 진영으로 들락거렸다. 병사들은 주민들 앞에서는 처녀들을 본체만체 하였지만 무당을 따라 영국군 진영 안으로 들어서면 휘파람을 불며 손을 흔들고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거문도 나리꽃만 피어도 가슴이 울렁대는 처녀들인데 파란 눈의 군복을 입은 젊은 영국 해군은 용왕의 아들이라도 나타난 것 같았다.
촌장과 칠석은 축구시합을 위해 열한 명씩 두 개 조로 나눠 짚을 둘둘 말아 둥글게 만든 짚공을 차며 맹연습했다. 하지만 공을 차려고 힘껏 발길질을 하면 공보다 짚신이 더 멀리 날아갔다. 촌장은 영국군 막사에서 병사들이 차던 축구공 생각이 떠올랐다. 이기려면 공다운 공이 필요했다. 촌장은 명절에나 잡던 돼지 한 마리를 잡아 주민잔치를 열고 거문도 대표로 시합 나갈 선수들에게 좋은 고기로 골라 양껏 먹도록 하였다. 고기를 먹어야 힘을 쓴다는 촌장의 생각에 칠석도 양기를 보충하려고 배가 터지도록 먹었다.
사실 촌장은 돼지의 오줌보를 축구공으로 쓰려고 돼지를 잡았다. 돼지 오줌보에 바람을 빵빵하게 불어넣고 창자구멍을 실로 묶자 영국군이 차던 축구공과 비슷한 공이 만들어졌다. 거문도 청년들은 열심히 작전을 짜고 연습하였지만 다음 날 돼지오줌보공이 너덜너덜 찢어지고 말았다. 칠석은 점례를 해밀턴 대위에게 보내 축구공을 하나 얻어오도록 하자고 하였다. 촌장도 시합을 위해 동의하고 그녀를 불러 이야기했다.
-우리가 이기려면 축구공이 하나 필요 하것는디...
칠석이 주저하는 촌장을 대신에 말했다.
-점례야, 해밀턴에게 축구공 하나만 얻어와 보랑께.
촌장이 다시 더듬더듬 얘기했다.
-축구시합에서 이겨야 너를 지키고 영국군을 거문도에서 몰아내 불 것인디...
점례는 무슨 뜻인지 알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해밀턴을 찾아갔다. 뜻하지 않은 시간에 점례가 찾아오자 해밀턴이 반갑게 맞이했다. 사정을 들은 대위는 막사로 들어가고 영국군 막사가 저녁노을에 물들었다. 점례는 노을을 감상하며 잠시 정신을 놓고 있었다. 대위가 시나브로 다가와 윤슬이 반짝이듯 무당의 입술에 키스했다. 점례는 접신을 한 듯 온몸이 부르르 떨리며 머리끝까지 전율이 일었다. 점례는 가슴에서 은장도를 뽑아들고 자신의 목에 날 선 칼날을 들이댔다. 대위가 놀라 두 손으로 진정하라고 손짓하며 두어 발자국 뒤로 물러서며 소리쳤다.
-노! 노오! 점례! 노오!
대위는 소리치며 축구공 하나를 급히 점례에게 내밀었다. 해밀턴이 크게 놀라는 것을 보고 그가 어찌해 볼 생각은 전혀 없었음을 알아차렸다. 성급하게 은장도를 뽑아든 것이 오히려 미안할 정도로 대위는 그녀에게 사과의 뜻을 표했다. 집으로 돌아온 점례는 크게 놀란 해밀턴의 얼굴을 생각하며, 웃음이 나오고 그의 얼굴이 아른아른 거려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깊은 밤까지 거문도 청년들은 마치 승리라도 한 것처럼 달빛 아래서 날뛰며 축구 연습을 했다.
점례는 대위를 초대해 식사 대접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녀의 집은 유림해수욕장 바닷가에 있고 영국군은 점례의 집 앞으로 지나다니며 보로봉에 대포를 숨기는 포대설치공사를 하면서 거문도 주민의 왕래를 통제했다. 유림해수욕장에는 점례의 집이 유일한 민가라 해밀턴을 집으로 초대해도 동네 사람들 눈에 띌 일이 없었다. 그녀는 혼자 사는 무당이었다. 초대받은 대위가 해질녘이 다 되어 홀로 보트를 타고 바다를 건너왔다. 해밀턴은 유림해수욕장에 보트를 대고 점례의 집 안으로 들어서며 처음 보는 광경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당 점례는 용왕신을 모셔 휘황찬란한 지전과 깃발 그리고 형형색색의 그림과 여러 가지 신의 얼굴을 가진 군상들이 노려봐 오싹함을 느꼈다. 하지만 점례 얼굴을 보자 금세 얼굴이 환해졌다. 그녀는 해밀턴을 위해 흰 쌀밥에 김치 한 접시로 밥상을 차리고 손바닥보다 넓은 갈치 한 마리를 토막 내고 밥상 옆에 화로 숯불을 피워 갈치를 구웠다.
노릇노릇하게 갈치가 익으며 고소한 냄새가 유림해수욕장으로 퍼져 나갔다. 대위는 수저 가득 밥을 뜨고 점례가 올려준 갈치 살을 받았다. 그는 갈치 살이 수저 가득 올려졌는데 계속 더 올리라고 손짓했다. 대위는 그녀가 탑처럼 올려준 갈치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해밀턴은 입으로 가져가던 밥숟가락을 돌려 점례의 입으로 들이밀었다. 입을 가리고 극구사양 하였지만 끝까지 우겨 마지못해 그녀가 제비새끼처럼 입을 벌리고 숟가락의 밥을 받아먹었다. 서로 먹여주고 받아먹으며 밥도둑 갈치구이에 밥 세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그들이 밥그릇을 비웠을 때는 피워 놓은 초가 새끼손가락만큼 짧아져 있었다. 대위가 포도주 한 병을 꺼내놓았다. 점례는 더 이상 안주가 없어 난감했다. 그녀는 영국군 막사에 초대받아 갔을 때 포도주 안주로 홍합 내놓은 것을 기억해 냈다. 달착지근한 포도주와 짭조름한 해산물 안주가 잘 어울렸다.
그녀는 포도주 병을 들고, 해밀턴 손을 잡고 해수욕장으로 달려나갔다. 백사장 바닷가에 다다른 점례는 저고리와 치마를 벗어 대위에게 맡겼다. 늘 물질하던 대로 물적삼 반바지를 입고 어깨끈이 달린 속저고리를 질끈 동여맸다. 한밤중에 속옷 차림으로 서 있는 무당을 보고 대위는 놀라 손사래 치며 벗어놓은 저고리와 치마를 들고 입히려고 하였다. 점례는 손을 뿌리치고 바다로 뛰어 들어갔다. 대위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그녀를 붙들지 못했다. 바다로 뛰어든 점례는 한참이 되어도 물속에서 나오지 않았다. 해밀턴은 가슴 깊이까지 바다로 뛰어 들어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찾아 헤맸다.
-점례! 점례! 점례...
대위의 목소리가 고도까지 울려 퍼져나갔다. 그가 안절부절 못할 때 밤바다에 “휘이!”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녀의 숨소리였다. 해밀턴이 점례의 숨소리보다 더 크게 안도의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가 서너 번 잠수해 망태기에 담아 바다에 숨겨두었던 전복을 찾아내 백사장으로 걸어 나오자 대위는 그녀를 번쩍 안아 물 밖으로 나왔다. 모래밭에 모닥불을 피우고 망태기의 전복 대여섯 마리를 석쇠에 올려놓았다. 흠뻑 젖은 물적삼이 몸에 쫙 달라붙어 점례의 몸매가 투명하게 드러나 해밀턴 얼굴이 숯불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숯불에 올린 살아있는 전복이 껍데기 안에서 물이 끓어오르며 몸통을 빙글빙글 비틀었다. 해밀턴이 잔인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점례는 노랗게 익어가는 전복을 보며 사발에 포도주를 따라 살짝 혀를 대보며 해밀턴과 건배하고 막걸리 마시듯 벌컥벌컥 들이켰다. 대위는 얼굴이 붉어지는 그녀를 달빛에 바라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파도가 살며시 밀려왔다가 물러가고 또 다시 밀려오고 하였다. 유림해수욕장의 점례와 해밀턴, 두 사람의 이야기를 엿듣는 것은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과 일렁이는 파도뿐이었다.
별빛에 취한 대위가 점례의 손을 살포시 잡았다. 그때 포도주에 취한 점례가 허리춤에서 은장도를 뽑아들었다. 화들짝 놀란 해밀턴이 벌떡 일어서며 손을 놓고 뒤로 물러나 두 손을 번쩍 들었다. 은장도를 보고 기겁하는 대위를 보며 점례가 피식 웃었다.
-아따! 이번에는 죽을라고 그런 것이 아니랑께. 전복이 맛있게 익었응께. 잘라서 안주해야제.
그녀는 혀 꼬부라진 소리하며 전복의 두툼한 살 아래 은장도를 집어넣고 뱅 돌려 껍데기에서 살을 분리해 살점에 열십자로 칼집을 냈다. 그리고 노릇하게 익은 전복을 은장도로 꾹 찍어 대위에게 내밀었다. 놀랐던 해밀턴이 다시 자리에 앉으며 입을 벌리고 전복을 받아먹었다. 그녀도 포도주를 한잔 더 마시고 전복 한 점을 은장도로 찍어 입에 넣었다. 점례는 세 사발의 포도주를 마시고 정신이 어질어질해 대위 어깨에 기대고 손가락으로 밤하늘의 별을 세기 시작했다.
-별 하나! 별 둘! 별 셋...
소리가 끊어지며 해밀턴의 품에서 잠이 들었다. 대위는 점례를 안고 집으로 들어갔다. 집 안에서는 촛불들이 마지막 심지를 태우고 있었다. 자리에 눕히자 가슴에서 은장도가 반짝였다. 거문도의 깊은 밤 파도에 조약돌이 몸부림쳤다. 해밀턴은 그녀가 은장도로 무슨 일을 저지를 것만 같아 은장도를 훔쳐 여명이 밝아오기 전에 보트를 타고 유림해수욕장을 떠났다.
다음 날 연병장에서 영국 해군과 거문도 주민 간의 국가대항 국제축구시합이 열렸다. 영국군은 붉은색 유니폼 입고 축구화 신고 나오고, 거문도 대표 선수들은 흰색 잠방이를 입고 모시로 만든 미투리를 신고 나왔다. 촌장은 축구공보다 먼저 날아가는 짚신 대신 특별히 축구선수들을 위해 아녀자들에게 모시로 미투리 신을 만들도록 했다. 미투리 끈을 칭칭 동여맨 거문도 선수들은 갈매기처럼 가볍게 연병장을 뛰어다니며 몸을 풀었다.
대위는 그래도 국가대항 국제시합이라 국민의례를 실시했다. 영국 해군 선수와 거문도 선수들이 나란히 선 가운데 영국의 유니언기가 올라가고 병사들이 <하느님, 여왕폐하를 지켜주소서>를 불렀다. 다음으로는 태극문양의 기가 올라가고 거문도 주민들이 <아리랑>을 열창했다. 국민의례가 끝나자 심판의 호루라기 소리가 울렸다.
-후루룩!
드디어 축구시합이 시작되자 영국군이 함성을 지르며 응원하고 거문도 주민들도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여 응원했다. 영국 해군이 일사분란하게 나팔소리에 맞춰 외치는 응원구호가 연병장을 압도했다. 거문도 주민들도 꽹과리와 북을 두드리며 다 함께 뱃노래를 합창했다. 뜨거운 양국의 응원 속에 영국 선수들의 조직적인 패스와 다르게 거문도 선수들은 열 명이 공을 쫓아 우르르 몰려다녔다. 촌장이 거문도 팀 감독이었으나 실제로는 모든 주민들이 감독이나 다름없었다. 패기 넘치는 거문도 선수들이 공을 몰고 다니면서 영국군 진영 골대를 위협했다. 공을 몰고 간 선수가 패스한 공을 다른 선수가 헛발질하면서 좋은 득점 기회를 놓쳐버리자 거문도 응원단에서 아우성이 터졌다.
-아이고! 저걸 못 집어넣고..
-촌장, 쟤 빼고 다른 선수 집어넣어 부란께[.
-내가 찼으면 무조건 골이었는디.
거문도 주민들은 너나할 것이 없이 모두 한마디씩 한탄했다. 그래도 힘이 넘치는 거문도 선수들은 영국군 골대 앞에서 공을 몰며 계속 기회를 만들었다. 영국군 감독을 맡은 대위가 영국군이 밀리자 강하게 선수들을 질책했다. 해밀턴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거문도에 울렸다.
-GO! GoGoGo!
촌장도 쉬지 않고 소리쳤다.
-야! 야! 공을 연결하란 말이여!
촌장의 말을 알아들고 칠석이 패스를 받아 정확하게 영국군 골대를 향해 강하게 공을 차 넣었다. 영국군 골대의 그물망이 찢어질 듯 휘청했다. 거문도 주민들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골! 골이다.
북소리와 꽹과리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고 점례도 박수치며 소리 질렀다. 거문도 선수들은 우승이라도 한 듯 들뜬 분위기였다. 점례가 칠석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고 그녀를 바라본 해밀턴은 화가 치미는 듯 발로 땅을 차고 믿기지 않은 듯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거문도 선수들의 떼거리 작전이 먹혀들어 영국군 선수들이 고전을 면치 못했다. 전반전이 거의 끝나갈 즈음 거문도 선수가 길게 차 준 공을 칠석이 박치기로 한 골을 더 넣었다. 거문도 응원단이 벌쩍벌쩍 뛰며 환호했다.
-와! 우리가 이기겠다. 영국 애들 완전히 물이네 물이랑께!!
심판의 호루라기가 울리고 전반전이 끝났다. 거문도 선수들은 당당하게 촌장 앞으로 걸어 나왔다. 거문도 선수들은 땅바닥에 앉아 주민들의 마사지를 받았고 점례는 칠석의 어깨를 주물러주었다. 그러나 영국군 선수들은 코가 빠져 고개를 숙이고 해밀턴은 선수들에게 휴식도 주지 않고 다그쳤다.
짧은 휴식이 끝나고 심판이 호루라기를 불고, 후반전이 시작되면서 영국 선수들이 빠르게 패스하며 공을 가지고 놀았다. 우르르 공을 쫓아다니던 거문도 선수들이 지쳐가는 반면 영국군 선수들은 짧은 패스로 공격을 주도하며 후반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공격수가 단독 드리블로 거문도 수비수를 모두 제치고 골을 넣었다. 영국군 응원단이 난리 블루스를 치며 거문도가 떠내려가도록 소리를 질렀다.
-와우! 잉글랜드 파이팅!
해밀턴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후반전은 일방적으로 영국 병사들 공격이 이어졌다. 후반전이 끝나갈 무렵 영국의 공격수에게 헤딩골을 한 골 더 허용해 점수가 2대 2가 되면서 승부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영국군의 공격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 파상적으로 이루어졌다. 거문도 선수들이 모두 골문을 지키며 몸으로 공을 막아내는 혈전이 펼쳐지는 가운데 심판의 후반전 종료 휘슬이 울렸다. 촌장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 대위는 역전시키지 못한 아쉬운 한숨을 뱉었다. 그러나 점례는 담담했다. 거문도 선수들이 이기는 것도 좋지만 영국군 앞에서 멋지게 굿판도 펼치고 싶었다. 더구나 거문도 선수들이 이기면 영국군이 거문도를 떠나기로 약속했으므로 속으로는 영국군을 응원했다.
아쉬운 무승부로 끝났지만 촌장과 대위는 승부를 가려야 했다. 영국군이 거문도를 떠나든 점례가 영국군을 위해 굿을 하든 양단간에 결론을 내야만 했다. 양 팀에서 다섯 명의 선수가 출전해 승부차기로 승패를 가리기로 했다. 5대 4의 상황에서 거문도의 마지막 선수는 칠석이었다. 승패의 열쇠를 쥔 칠석이 호랑이처럼 몸을 웅크리고 영국 골키퍼를 노려보다 번개처럼 달려가 젖 먹던 힘까지 다하여 공을 찼다. 칠석의 미투리가 벗겨지며 공과 동시에 솟구쳤다. 미투리는 하늘 높이 날아가고 공은 골대를 향해 정확하게 날아갔다. 골키퍼가 번개처럼 뛰어올라 칠석의 공을 손으로 쳐냈다. 영국군의 함성이 터졌다.
-와우! 와우! 와우!
영국군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환호하며 축구장을 뛰어다녔다. 거문도 주민들은 초상집 분위기로 변하고 칠석은 졸지에 영웅에서 역적이 되어버렸다. 영국군이 승리를 하면서 점례의 굿 준비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여러 날 준비한 탓에 영국군 병사들은 순식간에 연병장 중앙에 점례가 지시하는 대로 커다란 나무기둥을 군함의 돛대처럼 높게 세우고 오방천 백여 개를 알록달록하게 늘어트려 길쌈놀이를 준비했다.
칠석도 슬픔을 떨치고 성주풀이 굿에 합세해 굿거리장판을 빠르게 두드렸다. 점례가 새하얀 한복으로 차려입고 고깔 쓰고,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굿판으로 나풀나풀 걸어 들어왔다. 영국 해군들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오 마이 갓!
그들은 무당을 보고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착각했다. 거문도 아녀자들과 남정네들이 두 손을 모아 빌고, 무당은 삼산도 망향산에 날아든 학이 노니는 듯 우아하게 날개를 펼치고 너울너울 춤을 췄다. 사람들이 넋을 잃고 춤사위에 빠져들자 무당이 비나리를 하였다.
에라 만수 에라 대신이야
반갑네 반가워 영국 해군이 반갑네
거문도에 왔으니 잠시 머물며
신선바위 동백꽃 구경이나 하고 가소
남해바다 기와집몰랑 탐내지 말고
거문도는 영국 땅도 아니오. 청나라 땅도 아니다
러시아 땅도 아니고 일본 땅도 아니다
거문도는 조선 땅이라는 거 잊지 마라.
그녀의 비나리는 구성지게 남해바다에 울려 퍼졌다. 영국군들도 굿거리장단에 신이나 몸을 들썩였다. 굿판이 무르익으면서 영국군은 포도주를 내 오고 거문도 주민들은 동동주를 내왔다. 해군은 소시지를 안주로 내 오고 주민들은 말린 홍합과 전복을 안주로 내놓았다. 촌장과 해밀턴이 추렴으로 잡은 돼지 두 마리가 푸짐하게 안주로 나왔다. 영국군과 거문도 주민들이 어울려 한바탕 술판이 벌어졌다.
굿판에 흥이 오르자 점례는 길쌈놀이를 시작했다. 거문도 처녀들이 나와 오방천 한 자락씩 잡고 춤을 추며 돛대처럼 높이 솟은 나무기둥을 돌았다. 점례가 영국군 병사들에게 나오라고 손짓하자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그녀는 영국 해군들이 거문도 처녀들 사이사이 들어가 오방천 자락을 잡고 기둥을 중심으로 빙빙 돌며 춤을 추도록 하였다.
박수들이 굿거리장단을 빠르게 두드렸다. 취기가 오른 처녀들과 병사들이 알록달록한 오방천을 잡고 함께 길쌈놀이하며 술에 취하고, 알록달록한 오방천에 취하고, 서로의 처녀총각 향기에 흠뻑 취했다. 해군 병사들이 거문도 처녀들을 하나 둘 오방천으로 둘둘 말아 감싸 안고 함께 춤추며 길쌈놀이를 즐겨 병사들의 함성과 처녀들의 웃음에 거문도의 바위도 들썩였다.
영국군 병사들이 오방천 안에서 처녀들을 껴안고 돌자 촌장과 칠석 그리고 거문도 남정네들의 얼굴이 급속도로 굳어갔다. 무당이 오방천을 잡고 대위를 불렀다. 그들도 오방천으로 몸을 감싸고 서로 부둥켜안고 돌며 길쌈놀이에 신이 났다. 무당과 대위가 어우러지는 것을 보고 촌장이 칠석하게 굿거리장단을 멈추라고 소리쳤다. 한순간 장단이 뚝 멈추자 오방천을 잡고 있던 처녀들과 병사들이 얼음처럼 굳어 그 자리에 섰다.
촌장이 소리쳤다.
-뭔 짓들이여!
촌장의 호통에 처녀들이 하나 둘 오방천 속에서 빠져나와 슬슬 도망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처녀들이 우르르 도망쳐 나갔다. 점례는 급히 길쌈놀이를 멈추고 굿판을 마무리했다. 한참 신나던 영국군 병사들은 영문을 모르고 어리둥절하며 처녀들이 가버리자. 돌고래가 헤엄쳐 간 바다를 바라보듯 처녀들이 달아난 마을만 바라봤다. 해밀턴은 일순간에 분위기가 험악해진 것을 깨달았다. 그가 거문도에 도착해 엄하게 명령하였던 여자들을 가까이 하지 말라는 명령을 스스로 어긴 꼴이 되고 말았다. 인류의 모든 전쟁은 여자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을 해밀턴은 뼛속 깊이 알고 있으면서도 점례의 아름다움에 빠져 잠시 망각한 것이 커다란 사건으로 번지고 말았다.
촌장과 칠석은 무당을 이끌고 불이 나게 마을로 돌아갔다. 영국군 병사들과 거문도 주민들 사이가 급속도로 냉각이 되고 거문도 남정네들은 민감하게 영국군을 경계했다. 그러나 아녀자들은 영국 해군을 보면 먼저 말을 걸고 심지어 붙들고 늘어지며 희롱하기도 하였다. 그럴수록 남정네들은 영국군과 알게 모르게 갈등의 골이 파이고 있었다.
영국 병사들은 밤이면 처녀가 있는 집 문 앞에 통조림과 과자를 두고 가는 일이 다반사였다. 거문도 남정네들은 밤마다 횃불 들고 마을을 돌며 처녀들을 감시하고, 영국군 병사들이 마을에 나타나면 쫓아내려고 밤마다 싸움이 벌어졌다.
그런 와중에 해밀턴은 밤마다 보트를 타고 유림해수욕장으로 건너가 점례와 사랑을 나누었다. 대위가 그녀와 사랑에 빠지면서 해군 병사들을 통제하기 어려워 영국군은 밤마다 고비 풀린 망아지와 같았다. 거문도 처녀들은 남정네들의 철통같은 감시를 빠져나가 영국군 병사들과 노닥거리다 새벽에 돌아오곤 했다.
해밀턴은 낮에는 보로봉으로 포대구축공사를 하러 가면서 매일 유림해수욕장 점례의 집에 들락거렸다. 무당이 대위의 여자로 수문나면서 영국군은 그녀와 마주치면 거수경례했다. 점례가 무당이라는 이유로 박수 칠석 말고는 그녀의 집을 찾아오는 사람은 없었다. 매일 밤 대위는 그녀의 집을 찾아왔다가 새벽이면 영국군기지로 돌아갔다. 어느 날 늦잠을 자고 급하게 일어나 무당 집을 빠져나오던 대위가 새벽녘에 굿을 의논하러 오던 칠석 눈에 발각되었다. 보트를 타고 달아나는 대위를 보고 칠석은 눈이 뒤집혔다. 누가 뭐래도 무당과 박수는 결혼할 수밖에 없는 사이였다. 거문도 주민 중 무당이나 박수에게 시집오거나 장가들 사람은 없어 좋으나 싫으나 점례와 칠석은 결혼할 운명이었다. 칠석은 당연히 자기 각시가 될 무당을 대위가 범하였다는 생각에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를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해밀턴은 그날 밤도 보트를 타고 건너와 밧줄을 모래밭 바위에 묶고 돌아서려는 순간 칠석이 달려들며 낫으로 그의 등을 내리찍었다. 대위가 고꾸라지며 권총을 빼들고 다시 낫을 치켜든 칠석의 심장을 향해 쏘았다.
-탕!
한 발의 총성이 거문도에 울려 퍼지고 영국군 막사에서 비상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점례가 총소리에 놀라 해수욕장으로 달려나왔다. 대위와 칠석이 모래사장에 쓰러져 있었다. 그녀는 해밀턴을 부둥켜안았다. 등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리자 치마를 벗어 상처를 동여맸다. 칠석은 가슴에 커다란 총알구멍이 뚫려 피가 쏟아져 백사장이 핏빛이고 이미 숨을 거둔 다음이었다. 해밀턴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점례가 횃불을 흔들며 소리쳤다.
-여기요. 해밀턴 대위 여기 있당께요!
그녀의 다급한 목소리가 삼도에 울려 퍼지고 영국군 보트들이 횃불을 보고 빠르게 다가와 피를 흘리는 대위를 싣고 영국군 진영으로 돌아갔다. 거문도 사람들은 총소리에 놀라 집 밖으로 나오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점례만 칠석의 시신을 끌어안고 통곡했다. 날이 밝아서 집 밖으로 나온 촌장은 칠석이 대위의 권총에 맞아 죽었다는 사실을 거문도 주민들에게 알렸다. 주민들은 모두 격노하였으나 영국군 총에 맞아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선뜻 앞으로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영국 병사들은 예전과 다르게 거문도 주민에게 대위가 테러 당했다며 총으로 무장하고 다녔다. 거문도 주민들은 무서워 병사들이 보이면 숨기 바빴고 주민들과 영국군의 사이는 완전히 단절되었다.
칠석의 살해사건으로 해밀턴 대위는 홍콩의 영국해군사령부로 쫓겨 갔다. 그 사건 이후 영국군은 병력을 보강해 군함 세 척이 더 오고 해군 병사는 칠팔백여 명으로 늘어났다. 영국군은 거문도를 홍콩처럼 점령할 계획을 세우고 삼도의 곳곳에 진지를 구축하고 포대를 설치했다.
점례는 해밀턴이 홍콩으로 떠나고 꼭 여덟 달 후에 아이를 낳았다. 처녀인 그녀가 아이를 낳았다는 소리에 아녀자들은 죽은 박수 칠석의 아이를 출산한 줄만 알았는데 실제로 아이를 보고 놀라 줄행랑쳤다. 무당이 낳은 아이는 흰색 피부에 파란 눈을 가지고 태어났다. 무당 점례가 서양귀신 애기를 낳았다며 칠석을 죽인 중위의 자식이 태어났으므로 아기가 크면 거문도 사람을 모두 죽일 것이란 흉흉한 소문이 나돌았다. 촌장과 거문도 주민들은 그녀가 낳은 아이를 갖다버려야 한다고 떠들며 불시에 무당의 집으로 들이닥쳤다. 주민들은 점례가 안고 젖 먹이는 아이를 빼앗아 고깃배에 싣고 수월산 아래 선바위섬으로 가 산 채로 버리고 돌아왔다.
점례는 선바위가 내려다보이는 신선바위에 올라 아이를 부르며 통곡하면서 날마다 선바위가 보이는 신선바위에 올라 돌탑을 하나씩 쌓았다. 신선바위로 가는 길에 흘린 그녀의 눈물을 먹고 자란 보로봉 섬나리꽃이 붉게 피어난 날 점례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신선바위에서 바다로 뛰어내려 목숨을 끊었다.
해밀턴 대위는 일 년 후 다시 거문도로 발령받아 돌아왔다. 무당이 자기 아이를 낳았으나 자살했다는 가슴 아픈 사연을 전해 듣고 대위는 몇 날 며칠 신선바위에 올라 점례와 아이를 그리워하다 거문도를 떠나는 날 점례의 은장도를 거문도 바다에 바쳤다.
-끝-
송주성 소설가
2014년 제1회 금샘문학상 단편 <금샘>으로 대상 수상하고 작품활동 시작
2018년 제6회 직지소설문학상 대상
2019년 제1회 무예소설문학상 최우수상
저서
2018 장편소설 <직지 대모>
2021 장편소설 <국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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