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주성 소설 발표작

송주성 단편 <내 몸에 고래가 산다> 한국소설 2023년 10월호 발표

소설가 송주성 2023. 10. 6. 16:36

 

내 몸에 고래가 산다

 

송주성

 

갯벌에 갇힌 고래를 발견해, 수협공판장에서 경매로 이천만 원을 받았다고 태안에 사는 친구가 전화로 자랑을 해댔다. 어부 친구는 꽃게 한 상자 보냈으니 코로나19로 힘들어도 맛있게 먹으라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바다 로또에 당첨된 친구의 행운이 기쁘기도 하고 또한 한없이 부러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수북이 식탁에 쌓여있는 고지서들이 머리와 가슴을 짓눌렀다. 아내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지 안방에서 긴 한숨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더 이상 돈을 융통할 곳도 없는데 당장 월말까지 막아야 할 돈이 오백만 원이 넘었다. 국민연금은 못 낸 지 오래되었고 국민건강보험료도 일 년 넘게 밀려있었다. 수도와 도시가스는 두어 번 중단된 이후로 한 달 치씩 납부하며 겨우 생활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주택대출융자금 이자 미납으로 경매 최고장은 우편배달부가 가져오고, 아내의 카드회사에서는 월말이 가까워오면 매시간 납입 독촉 전화을 했다. 아내 카드까지 정지되면 정말 큰일이다. 나는 오래 전에 신용불량자가 돼 빈 통장만 가지고 있었다.

그 동안 아내의 변통으로 다달이 어렵게 버텼지만 더 이상 손 벌릴 곳이 없다고 하소연했다. 아내는 다 포기하고 싶다며 단수된 수도꼭지에서 물이 펑펑 쏟아지듯 눈물을 쏟았다. 나에겐 특별한 대책이 없다. 그렇다고 돈을 빌릴 만한 사람도 없다.

보험설계사로 일하는 아내도 한때는 보험왕까지 하며 월급이 천만 원이 넘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요즘은 코로나19로 사람 만나기조차 어려운 상황이라 백만 원 벌기도 힘들다고 한다.

나는 출근은 해도 코로나19로 월급을 못 받아온 지 거의 일 년이 되었다. 언제 회복될지 모르는 코로나19 사태로 할 일이 없어 일찍 퇴근해 혼자 꽁치통조림에 소주를 마시다보면 새벽 한두 시는 보통이다. 그렇게 무력하게 산 지 벌써 이 년이나 되었다. 아내가 조금씩 벌기는 하지만 가정생활은 엉망이 될 대로 되어버렸다. 장마는 지루하게 계속되고, 먹구름처럼 감당하기 어려운 그림자가 몰려오고 있어 태안 친구처럼 고래라도 찾아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 날 오후 사무실에 앉아 사채광고를 뒤적이는데 아내가 전화를 걸어왔다.

-당신 다섯 시까지 우리 회사 앞 병원으로 오세요.

-왜?

-당신 갑상선 검사 한 번 해보게요.

-싫어, 나 건강해!

-당신 암보험 해약하려는데 마지막으로 검사 한 번 해봅시다.

-필요 없다고!

-내 소원이니 고집 피우지 말고 꼭 오세요.

아내는 대답도 하기 전에 전화를 끊었다. 예약한 병원은 동네의 오래된 이비인후과였다. 아내는 병원 안에서 기다리고 있고 노인네들이 정신없을 만큼 많이 대기하고 있었다. 접수하는 분이 아내의 친구라며 반갑게 인사했다. 나는 앉아서 기다리는 동안 그냥 뛰쳐나오고 싶었다. 엉덩이가 들썩이자 아내가 무릎을 눌러 앉혔다. 노인들 서넛이 진료받고 나오고 내 이름을 불렀다. 먼저 와 기다리던 환자들이 의심의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자 접수하시는 분이 조용히 말했다.

-예약하고 오신 분입니다.

개떼처럼 무섭게 바라보던 대기 환자들이 다시 눈을 돌리고 나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원장실은 딸랑 작은 침대 하나가 있고 작은 책상과 초음파기계가 있었다. 컴퓨터는 십 년도 넘은 것 같고 초음파기계는 똑바로 화면이나 나올지 의심이 갔다.

원장이 어떻게 왔냐고 묻기도 전에 아내가 먼저 말했다.

-원장님, 남편이 계속 잠만 자고 무기력해서 혹시 갑상선에 이상이 없나 초음파검사를 하려고요.

-그렇다고 어떻게 갑상선검사를 할 생각을 하셨나요?

-저도 오 년 전에 갑상선암 수술을 받아서 잘 압니다.

아내의 말을 들은 원장은 나를 침대에 눕히고 와이셔츠 단추를 풀어 목덜미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종이를 깔았다. 목에 크림 같은 약품을 바르더니 초음파기계를 목에 갖다대고 오른쪽 목부터 미끌미끌하게 초음파기계를 움직였다.

화면을 보면서 의사가 한마디했다.

-오른쪽 갑상선은 깨끗합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아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뭔가 실망한 것 같은 얼굴빛이었다.

-그럼 왼쪽도 볼까요?

원장은 얘기하며 왼쪽 목으로 초음파기계를 옮겨 이리저리 움직였다. 나는 원장 입을 바라보며 누워있었다. 위아래로 왔다 갔다하던 손을 멈추고 원장이 뭔가를 찾은 듯 화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잠깐만요, 여기 이쪽에 작은 혹이 하나 보입니다.

의사의 말에 고래라도 발견한 듯 아내의 목소리가 커지고 컴퓨터화면을 바라보며 열심히 원장에게 질문해댔다. 한참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내 눈 앞으로 화면을 들이대며 원장이 설명했다.

-환자 분, 여기 하얗게 보이는 부분 보이시지요?

-나비모양 갑상선에 크지는 않지만 여기 0.4mm 정도의 혹이 있습니다. 검사를 하고 악성이면 수술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의사는 컴퓨터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나를 내려다보고 말했다.

-우리 병원에서도 조직검사는 가능합니다.

흥분한 아내가 목소리를 높이며 말한다.

-그럼 지금 하세요. 원장님 당장 검사해주세요!

나는 천천히 일어나며 다음에 와서 다시 검사를 하겠다고 했다. 원장은 적극적으로 권하지는 않았다. 며칠 있다 진정되시면 그때 와서 조직검사를 하라며 다음 환자를 불렀다. 아내는 계속 따라오며 검사를 종용했지만 난 귀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저녁에 집에 온 아내는 뭔가 좋은 일이 있는 것처럼 오랜만에 얼굴에 활기가 돌았다. 저녁밥을 먹고 아내는 내 옆에 바짝 앉아 사과를 깎아 입에 넣어주며 코 맹맹하게 애기했다.

-당신 암보험 알아봤는데 갑상선암이면 이천오백만 원은 받겠더라. 암이 아니고 건강하면 좋은데...

아내는 말꼬리를 흐리며 안방으로 사라졌다.

 

내가 갑상선암 진단을 받으면 이천만 원의 진단금과 암수술비 오백만 원이 나온다는 아내의 설명이었다. 아내가 암보험까지 해약하겠다고 한 것은 암보험으로 약관대출을 받았는데 이자 내기도 힘들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검사나 하고 해약하려던 것인데 갑상선에서 혹이 발견된 것이다. 그래도 갑상선암도 암인데 나는 무서웠다. 물론 죽는다는 생각은 없었다. 또한 죽는 것이 두려울 나이도 아니다. 죽음보다 무서운 가난이 더 원망스러울 뿐이다.

아내는 다음날 바쁘게 움직였다. 나는 그 병원에서는 조직검사를 하고 싶지 않았다. 아내는 즉시 병원으로 쫓아가서 종합병원 진료의뢰서를 받아왔다. 아내는 보험사 헬스케어써비스를 통해 몇 달 걸린다는 내분비과 진료예약도 바로 다음 날 오전 아홉시 예약으로 받아왔다.

우리 집에서 서울 강남의 병원까지는 빠르면 삼십 분 걸리고 길이 막혀 늦으면 한 시간 안에 도착이 가능했다. 다음날 병원 가는 길은 비가 많이 내렸다. 분당수서고속화도로는 출근시간에 비까지 내려 거대한 주차장 같았다. 더군다나 교통방송에서는 청담대교에서 차량전복사고가 발생해 사고처리로 교통체증이 심하다고 우회도로로 돌아가라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돌아갈 만한 거리가 아니었다. 복정동을 지나고 다음 나가는 곳에서 나가면 바로 삼성병원으로 연결되었다. 아홉시 예약인데 시간은 여덟시 오십분을 지나고 있었다. 길만 뚫리면 오 분 안에 도착할 거리였지만 차들은 바위처럼 도로에 붙어 꼼짝하지 않았다.

아내는 조급한 마음에 안절부절 난리가 났다. 병원에 전화해 예약시간을 열시로 미루고 오늘 꼭 진료를 받아야만 한다고 기를 썼다. 병원에 도착한 시간은 무려 열시 삽십분이 넘어가고 있었다. 다행히 우리처럼 교통체증으로 예약시간에 늦은 사람들이 많아 그 시간에도 진료받을 수 있었다. 헬스케에센타를 통해 예약하면 원스톱진료시스템이라 모든 대기자들보다 항상 우선순위라고 아내가 자랑스럽게 떠들었다. 우리는 도착하자마자 바로 진료실로 들어갔다.

담당의사는 컴퓨터를 통해 전송받은 초음파 사진을 보고 있었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아내가 대답했다.

-광주에서 왔습니다.

-전라도 광주요?

-아니요. 경기도 광주요!

-아 네, 혹시 멀리서 오셨나 물어봤습니다.

-초음파 사진상으로는 혹이 아주 작고 물혹 같습니다. 가까운 곳에 사시니까. 다음에 다시 검사를 받아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0.5mm도 안 되는 혹으로는 조직검사를 해도 결과가 안 나올 수 있습니다.

나는 암이 아니라 물혹 같다는 말에 긴장했던 마음이 풀리고 어서 집으로 돌아갈 생각으로 벌떡 일어나 의사하고 얼굴을 마주하고 서서 가볍게 인사했다. 의사가 마스크를 벗으며 얘기했다.

-멀리 전라도에서 오셨다면 다시 오시기 힘드니까. 환자 분이 원하시면 검사를 해주고는 있습니다만. 가까운 곳에 계시니까. 좀 더 지켜보다가 혹이 계속 자라면 그때 검사를 받아보세요.

아내는 절대 물러서려고 하지 않았다. 아직 작아도 걱정되니까 꼭 검사를 해달라고 아내가 사정했다. 의사는 나를 바라봤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가 걱정스러운 듯 굳이 검사를 안 받아도 될 것 같다고 강조하며 요즘 TV에서 갑상선암 과잉진단으로 수술하지 않아도 될 환자들을 무리하게 수술을 한다고 뉴스가 나온 다음부터는 0.5mm이하의 갑상선 혹은 조직검사를 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장황한 의사의 설명에도 아내는 포기하지 않았다. 불꽃이 튀는 아내의 눈초리를 바라보며 나는 의사에게 검사를 받겠다고 얘기했다. 의사는 나에게 서너 번 물어본 다음에 초음파실 진료를 잡아주었다. 내분비과 초음파검사실은 2층에 있었다. 대기실 의자마다 환자들이 붐볐다. 나는 한쪽 의자에 앉았다. 아내는 미안한지 아메리카노 한 잔을 사와 나에게 내밀었다. 대기실에는 지방에서 가족단위로 올라온 사람들이 가득했다. 초음파검사실을 나오는 환자의 한마디에 기다리던 가족들은 울고 웃었다.

오십대 여성 환자가 나오며 크게 외쳤다.

-나 암 아니래!

온 가족이 우르르 몰려가 야단법석을 피웠다. 박수치고 웃고 떠들며 개선장군이라도 맞이하듯 둘러싸고 한 무리가 사라지면 또 다른 환자가 나왔다. 마흔 이쪽저쪽의 남성이 고개 숙이고 눈물을 글썽이며 검사받고 나와 죽을 사람처럼 한마디 내뱉었다.

-갑상선암이라고 당장 수술받아야 한대...

전쟁터에 나간 사람의 전사통지라도 받은 것처럼 한참 침묵이 흐르고 일순간 한 사람의 흐느낌으로 시작해 금세 울음바다가 되었다. 그들이 돌아가면 또 새로운 환자가 나오고 희비가 엇갈렸다. 묵묵히 차례를 기다리며 그들을 바라보던 아내와 나는 눈이 마주치며 웃음이 나왔다.

나하고 아내는 암으로 많은 가족을 잃었다. 아버지는 위암으로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갑상선암으로 돌아가셨다, 장인어른도 위암수술을 받고 장모님도 여러 번 심장병 수술을 받았다. 아내도 갑상선암 수술을 받았으니 암이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의 이야기가 된 지 오래였다. 회사에 출근하면 누구누구가 암에 걸렸다는 얘기가 매일의 화젯거리였고 사람들은 가장 먼저 암진단금이 얼마 나오는가 묻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암에 걸려 암진단금을 몇 억씩 받아 집을 사고, 차를 사고, 땅을 산 사람들도 허다했다. 하지만 암에 걸려 직장을 잃고, 수술비 마련을 위해 집을 팔고, 이혼하고 패가망신한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아내나 나나 갑상선암 정도는 맹장수술보다 쉽게 생각하는 병이 되었다. 그러나 갑상선암으로 죽은 사람도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마음 편한 일은 아니었다. 아내도 마음은 몹시 슬프고 아픈 일이지만 그보다 더 급한 돈 앞에서는 악마가 되어갔다. 나 또한 무능함을 만회할 길은 갑상선암 진단밖에는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래서 아내와 나는 내 몸 안에 사는 고래를 찾아나섰다.

 

초음파검사실 의사는 젊은 여의사였다. 나보다 앞서 수십 명이 검사받고 갔기에 젊은 여의사는 아무 감정이 없어 보였다. 하기야 하루에도 몇 십 명씩 암진단을 내리고 조직검사를 하는 의사가 무슨 슬픔이 있고 아픔이 있겠는가. 생전 처음 암에 걸리는 사람들이야 죽을 것 같은 슬픔에 괴로워하지만 젊은 여의사는 그런 감상적인 감정을 느낄 것 같지 않았다.

초음파 검사실은 아내가 따라 들어오려다 간호사에게 저지를 당하고 나 혼자였다. 여의사는 빠르게 초음파기계를 움직이며 화면을 노려보았다. 두어 번 목 전체를 훑어보고는 머리 위 컴퓨터 화면을 내 눈 앞으로 내리고 자세히 설명했다.

-환자 분, 보세요.

-환자 분, 이렇게 까맣게 보이는 것은 거의 물혹입니다.

-암이 아닌 거 같습니다. 조직검사는 안 받아도 될 거 같습니다.

-그리고 혹이 콩알보다 작아 검사하기가 어렵습니다.

나는 무의식처럼 대답했다.

-그래도 불안하고 무서우니까. 조직검사를 해주세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여의사는 말을 이어갔다.

-꼭 하고 싶으면 일 년 후에 초음파검사를 다시 받고 하세요.

나는 이미 아내에게 최면이 걸린 것처럼 여의사에게 조직검사를 해달라고 조르고 있었다. 초음파검사 대기실에서“당신은 갑상선암입니다.”라고 의사가 말하기를 기도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젊은 여의사는 물혹이라고 단정을 해버렸다. 여의사도 황당했을지 모른다. 암이 아니고 물혹이라고 말하면 다른 환자들은 좋아서 날뛰며 검사실을 뛰쳐나가는데 물혹이라고 몇 번을 얘기해도 못 믿겠다고 조직검사를 해달라고 하는 놈에게 자기를 무시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여의사는 정말로 조직검사를 하고 싶은지 무려 세 번 이상을 묻고 물었다. 나의 억지에 젊은 여의사는 수긍하고 조직검사를 허락했다. 그러면서 결코 조직검사가 몸에 좋은 일은 아니라고 마지막 당부 겸 나의 동의를 구했다.

마지못해 여의사는 나의 목에 주사바늘을 꽂고 혹의 조직을 떼어냈다. 검사결과는 일주일 후에 나온다고 했다. 그날 열시까지 와서 조직검사 결과를 확인하라고 알려주고 검사는 끝났다. 대기실 밖에서 기다리던 아내는 의사가 물혹이라고 진단했다는 말에 얼굴이 굳어졌다.

아내가 영혼 없는 한마디를 했다.

-당신이 건강하면 좋지...

아내의 그 말이 왜 그렇게 슬프게 들리는지 가슴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아내의 마음도 찢어지게 아프고 쓰리다는 것을 알고도 남지만 우리 현실이 어처구니없다는 생각에 내가 너무 불쌍했다. 아내를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숨을 끊고 싶었다. 아내를 이렇게 만든 것은 모두 나의 잘못이고 무능함이었다. 돌아가는 차에서 아내는 아무 말이 없었다. 갑상선암이 아니기를 기도하며 신의 뜻에 따르겠다고 마음의 죄의식을 회피했는지도 모른다.

아내는 퇴근시간에 삼겹살과 소주 두 병을 사왔다. 삼겹살을 굽고 못 마시는 소주를 아내도 서너 잔 마셨다. 한 병 반을 마신 나는 알딸딸했다. 술에 취한 아내가 눈물을 흘리며 얘기했다.

-코로나19 때문에 당신에게 몹쓸 짓을 하고 있지만 다른 방법이 없네요. 이제는 우리에게 돈 빌려줄 사람도 없어요. 미안하지만... 당신이 진단금 못 받으면 우리는 끝이에요.

아내는 상추쌈 하나를 싸 먹여주며 소주 한 잔을 따라주었다. 나도 아내의 잔을 채웠다. 이십 년을 살면서 둘이 앉아 술을 마시며 진지하게 이야기를 해본 적도 없는 거 같았다. 아내는 울다 얘기하고 다시 얘기하다 눈물을 흘렸다. 나는 눈물도 말라버린 것인가 흘릴 눈물마저도 없는 것인지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멍하니 아내의 얘기를 들어주는 것이 무능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짓이었다.

아내는 한참을 이야기하다 안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잠들기 어려웠다. 살아오면서 가장 미안한 사람이 있다면 아내가 아닌가 생각했다. 늘 고생만 시키고 아내의 가슴을 아프게 했지만 “미안하다.”“고맙다.”는 소리는 한 번도 못하고“사랑한다.”말은 생각조차도 안 했다. 살아온 내가 버러지처럼 못나고 부끄러웠다. 더구나 경제적 무능함까지 갖춰 살림을 맡은 아내가 불쌍했다. 이제 일주일 후에 나올 조직검사 결과를 기다리며 갑상선암 진단이 나오기만을 바라고 원할 뿐이었다.

우리는 이미 오 년 전에 아내의 몸에서 고래 한 마리를 찾았었다. 아내는 오 년 전 갑상선암 진단을 받고 일곱 시간을 수술해 양쪽 갑상선 두 개를 모두 잘라냈다. 그리고 진단금 삼천만 원 받아 새 차를 샀다. 그리고 그 돈으로 여행도 다니고 열심히 맛집도 찾아다녔다.

아내와 나는 돈 잘 벌 때 저축을 할 걸 후회했다. 우린 늘 돈을 잘 벌 줄 알았다. 다른 사람이 아끼며 안 먹고 안 놀면 젊은 날은 짧고 빠르게 간다고 얘기하곤 했다. 이젠 그들이 우리 부부를 바라보며 손가락질했다. 아내와 나는 서로를 원망했다. 아끼고 저축하지 않았음을 서로가 원망하고 서로의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지나간 일을 둘이 얘기해봤자 싸움밖에 되지 않았다. 감정이 격해져 서로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상처만 남기고 있었다.

다음날 아내가 카드회사에서 계속 독촉 전화가 온다고 투정을 부리며 어디서든 오백만원만 마련해 보라고 카톡을 보내왔다. 지옥 같은 월말이 다가오고 있다는 신호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늘 그랬던 것처럼 문자를 씹고 침묵을 지키는 일이었다. 아내가 지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한참 쉬지 않고 카톡을 보내던 아내도 답이 없으니 지쳐서 그만두었다. 그러고 나면 나는 술을 마시고 만취해야 아내가 잠든 시간에 집으로 돌아왔다. 물론 아내는 내가 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일어나 굳이 말을 시키지는 않았다. 말을 걸어도 내가 받아주지 않고 그냥 자 버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답답하고 한심한 노릇이지만 아내도 별다른 대책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하루하루가 넓은 바다에서 고래를 찾는 것보다 훨씬 힘들고 고통스러워 아내의 얼굴은 날마다 굳어갔다. 내 얼굴을 바라보지도 않더니 아내가 나를 집 밖으로 불러내 돈 좀 구해보라며 눈물을 흘렸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바람에 흔들리는 강아지풀처럼 고개만 끄덕였다.

삼 일째는 종일 돈 좀 빌려보라는 아내에게 시달렸다.

-막노동을 해서라도 생활비를 벌어와야 반찬이라도 사다 먹지요!

아무런 대꾸가 없자 아내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나의 욱하는 성격이 가스통이 터지듯 폭발했다.

-야! 이 미친년아! 누구는 안 하고 싶어 안 해. 할 만한 일이 없어 찾고 있는 중이라고 몇 번을 얘기했어.

-말로만 찾으면 뭐하냐고 행동을 해야지...

나는 극도로 흥분된 상태였다. 결혼하고 삼십 년 동안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욕을 이미 해버린 다음이었다. 욕은 계속 튀어나왔다.

-그래, 개 같은 년아 죽자 죽어 죽으면 그만이지...

나의 쌍욕에 당황한 아내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수치스런 마음에 아내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 큰소리에 놀란 딸이 방문을 열고 지켜보고 있었다. 겁에 질린 딸은 소리 없이 나만 쏘아봤다. 아내의 눈보다 딸의 눈이 독하고 무서웠다. 절대 용서할 것 같지 않는 눈빛이었다.

나는 집 밖으로 뛰쳐나왔다. 하늘을 바라보며 소리 없이 통곡했다. 눈물이 거침없이 흘러 나왔다. 돈이 나를 비참하게 만들며 막판의 타락으로 이끌었다.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연이어 벌어지고 있었다. 아내와 나는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 것처럼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 칼끝에 올라선 선무당처럼 날뛰고 있었다. 아니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아내도 수면제를 서너 알 입에 털어넣고 안방으로 씩씩거리며 들어갔다.

다음 날은 오만가지 생각에 시달리다 날이 밝았다. 아내는 출근하고 나는 잠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때는 오후 한 시가 넘어 배가 고팠다. 그런 상황에서도 어김없이 배는 고파왔다. 미련하고 한심했지만 찬밥이라도 한 덩어리 먹어야 했다. 냉장고는 텅 비어 그 흔한 계란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굴러다니던 김 봉지도 하나 안 보였다. 싱크대를 다 뒤져도 라면 한 봉지가 안 나왔다. 그나마 찬밥 반 그릇이 냉장고에서 오래된 듯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아직 전기공급은 중단시키지 않았는지 전자레인지는 전기가 들어왔다. 김치도 다 떨어지고 총각무 한 조각이 반찬통에서 딸각거렸다. 총각무 한 입을 깨물고 찬밥 한 덩어리를 목으로 넘기면서 가슴이 메여와 다시 한 번 나의 무능함에 탄식했다. 아내의 하소연이 잔소리가 아니라 우리의 현실이라는 것이 뼛속 깊이 저미어 왔다.

막 나가려는 나를 붙잡고 딸이 따졌다.

-어제 엄마한테 욕했지?

-...

-다시는 아빠 안 보려고 했다. 엄마한테 절대 욕하지 마라.

아픈 가슴 속 깊이 딸이 긴 창을 꽂았다. 그날 저녁은 얼마나 술을 마셨는지 언제 어떻게 집에 왔는지 아무런 기억도 없이 다음날 늦게 눈을 떴다. 오 일째 날이었다. 이틀만 더 있으면 결과가 나왔다. 혹이 아무리 작아도 조직검사에서 암 판정만 받으면 된다. 그러면 아내의 걱정도 사라지고 나도 아내의 시달림을 피할 수 있었다. 당분간은 돈 걱정 덜고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내와 나는 모든 희망을 갑상선암 진단에 걸고 일주일의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고시생들이 5수 6수하고 시험 결과를 기다리는 것보다 우리는 더 절실했다. 아내와 나는 별다른 말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갑상선암 진단으로 이천오백만 원만 받으면 갚아야 할 모든 것을 갚고도 남았다. 그러면 딸하고 외식도 하고 날마다 통닭도 배달시키고 딸애가 먹고 싶다는 삼겹살도 못 사주었는데 맘껏 몇 날이고 삼겹살만 먹으며 살 수 있었다. 딸애가 먹고 싶다는 통닭 한 마리도 못 시켜주면 가슴이 찢어졌다. 돈이 있을 때는 다이어트 하라고 거절도 쉽지만 통닭 한 마리 못 사주는 입장에서는 가슴에 말뚝이 되었다. 피가 거꾸로 솟고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았다. 아내는 빚 독촉에 지쳐 일도 못하고 있었다. 오 일째 날은 별 탈 없이 지나가는 듯했다.

한참의 침묵을 깨고 사촌동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형님, 아버지가 조금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어느 병원으로 모셨어?

-현대병원입니다.

-응, 그래 곧 갈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지만 날벼락이었다. 작은아버지가 암으로 십 년 이상 투병하시다 돌아가셨다. 그나저나 돌아가신 작은아버지보다 내가 더 큰 문제였다. 당장 돈이라고는 지갑에 있는 천 원짜리 두 장 이천 원이 전 재산인데 어디서 조의금을 구해야 할지 암담했다. 아내도 전화를 끊자마자 조의금 걱정부터 했다. 어려움은 연달아 온다고 신도 잔인했다. 안 그래도 요즘 같은 코로나19 시국에 초상이라도 나면 큰일이라고 마음 졸였는데 터질 일이 터지고 말았다. 그렇다고 작은아버지 장례식을 안 갈 수는 더더욱 없는 일이었다. 여기저기 전화로 부고를 알리고 문자를 보냈다. 시골에 사는 동생이 전화를 걸어왔다.

-형님, 나는 못 올라가겠는데 얼마나 조의금을 해야 할까요?

-많이 하면 좋지만 적당히 해라. 그래도 적게는 못하지.

-막내하고 상의해서 보내고 올라오지는 마라 내가 작은어머니께 잘 얘기 할게.

-예, 그럼 막내하고 상의해서 보낼게요. 형님이 알아서 하세요.

나는 조의금으로 고민하고 있는데 한 시간 쯤 지나자. 온라인통장 입금문자가 왔다. 막내가 먼저 오십만 원을 입금하고 동생이 바로 또 오십만 원을 입금했다. 내 머리는 번개처럼 빠르게 돌아갔다. ‘백만 원을 찾아서 봉투 세 개에 삼십만 원씩 넣고 십만 원은 차비하자.’ 나에게 다른 선택의 방법은 없었다. 돌아가신 작은아버님이 이 일을 아시면 저승길을 못 가시고 나를 엄벌하러 살아 돌아오신다고 해도 나는 어쩔 수가 없었다. 살다 살다 작은아버님 조의금까지 떼어먹는 놈이 될 줄은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장례식장은 손님들로 붐볐다. 육 일째 밤을 밤새 술로 보냈다. 다음날 아침 오전 열시 조직검사 결과를 들어야 하므로 아내는 밤에 먼저 집으로 보냈다. 작은아버지의 화장터 예약시간도 오전 열시였다. 날이 밝고 영구차는 화장터로 향했다. 영구차에서 화장터로 옮기는 작은아버님의 관을 들고 마지막 가시는 길에 나는 기도했다.

‘작은아버지, 저를 용서하시고 편안하게 천국으로 가세요.’ 목사님의 기도가 끝나고 작은아버님이 타신 방주는 화로 속으로 사라졌다. 화장은 한 시간 가량 걸린다고 했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들은 또 살아야 하므로 작은아버님이 불에 타는 동안 화장터에서 밥을 먹었다. 밥을 먹고 화장터 한 바퀴 돌고 커피 한 잔 뽑는데 아내의 전화가 왔다.

-당신! 물혹이라네.

아내의 목소리는 맥이 죽 빠져있었다. 아내는 발견한 죽은 고래가 밀물 때 살아나 바다로 돌아가버린 듯 외마디를 했다.

-여보, 나 여기서 쓰러질 것 같아.

-그래 어떻게 하면 좋냐?

나도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었다. 아니 작은아버님을 따라 가버리고 싶었다.

아내가 다시 한마디했다.

-그래도 당신이 건강하다니까... 기분은 아주 좋네. 방법이 있겠지!

아내는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아내는 회사로 가고 나는 집으로 와 이틀간 못 잔 잠을 청했다. 너무 피곤해 어떤 고민도 걱정도 할 정신이 아니었다. 종일 깊은 잠에 빠졌다. 아내가 퇴근해 와서 나를 깨웠다.

아내의 표정은 밝았다.

-작은아버님 돌아가신 것 보니까 산다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네... 당신이 살아 있다는 것보다 행복한 일은 없는 것 같아...

고래는 놓쳤지만 내 몸에는 고래 새끼가 살고 있다. 매년 갑상선 검진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 누구도 내 고래는 잡아갈 수가 없다. 내 몸 어디에 숨어있든 이제 고래를 더 이상 찾지 않고 아내도 고래를 찾아 슬픔의 바다를 걷지 않기로 했다.

아내에게 말했다.

-여보, 너무 미안하고, 참으로 감사하고 그리고 사랑해!

처음으로 아내에게 고백했다.

아내는 행복한 눈물을 한없이 흘렸다. 나는 아내를 꼭 껴안고 고래가 사는 바다보다 깊은 키스를 했다. 다음날 중고차매매시장으로 차를 몰았다. 아내의 고래로 산 차를 팔아 급한 불부터 끄기로 했다. 그래도 차 가격을 오백만 원은 받을 수 있었다. 아내의 통장으로 입금해주었다.

 

-끝-

 

 

송주성 소설가

 

수상

2014 금샘문학상 대상. 작품활동 시작

2018 직지소설문학상 대상

2019 무예소설문학상 최우수상

 

저서

장편소설 2019 <직지 대모>

장편소설 2021 <국궁>

장편소설 2023<후쿠시마 참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