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은
이현신 작가의 첫 번째 소설집으로 개인과 개인의 미세한 틈을 통해 발견해 낸 사회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사회문제를 다루면서도 그 속에 함몰되거나 퇴행하는 부정적인 모습이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개인의 개체 위에 만들어진 기억의 서사와 그 이면에서 작동하는 내면의 갈등을 통해 사회가 만든 거대한 질서를 성찰하고 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일상을 말하는데도 그 자체에 국한되지 않고 또 다른 차원의 폭넓은 의미론적인 형상을 만들어 낸다. 그 결과 해외입양아, 빌라 이웃, 심리상담사, 손을 다친 환자, 의사, 몸의 자율성을 잃은 남자, 골프장 캐디, 여행사 직원 등 다양한 인물 형상이 자기 반성의 알레고리로 등장한다. 소설은 그 주체들이 구축한 개인 그 ‘틈’의 망막에 타자가 비추기 시작하고, 사회로 향한 응시가 비추기 시작하는 자아를 정면으로 보여주고 있다.
「달래꽃」은 해외입양아를 소재로 다룬 소설로 바르샤바 대학 문학부 박사과정의 여성이 화자인데 출구 없는 막막함 감정이 가득한 소설이다. 자칫 입양아라는 태생에게 가해지는 일방적이고도 허무주의적인 운명론으로 비약하지 않으면서도, 불가항력적인 삶의 조건 앞에서 자아를 응시하는 존재론적 비감이 배면에 깔린 격조 높은 소설이다.
「틈」은 낙원빌라 입주민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통해 타인과 코로나19 시대의 사회를 사유하는 소설이다. 낙원빌라 501호에 사는 순영은 502호에 사는 귀례 씨와 사이가 좋지 않을 뿐만 아니라 302호 여자와도, 총무와도 그렇다. 낙원빌라를 둘러싸고 일어난 크고 작은 일들 때문이다. 타인에 대한 불순한 혐오와 괴팍한 편견이 바이러스와 함께 틈새를 비집고 스며든다 해도, 그 틈이야말로 사회적 동물인 인간의 숨통이라는 깨달음의 여운이 오래도록 머무르는 소설이다. 코로나바이러스의 지속적인 위험에 노출된 현실과 삶에 대한 사유의 폭과 범위를 넓혀가지 않으면, 그리고 공존하는 사회를 위한 열린 사유를 계속하지 않으면 필히 있을 수 있는 위험을 피해갈 수 없다는 경고로 읽히는 값진 작품이다.
「다다음 생애도」는 친구 명훈의 옆에서 그를 관찰하는 상담심리사가 화자인 소설인데 감정을 드러내지 못하고, 신뢰나 헌신을 사랑과 혼동하는 명훈과 그를 웃게 하는 유일한 여자의 감정선이 밀도 높은 긴장감으로 나타나는 작품이다. 삶의 한가운데로 소리 없이 비집고 들어온 용인 받지 못한 사랑을 무심과 허심을 가장한 채 속절없이 바라보기만 하는 명훈이 보여주는 막막한 슬픔이 작품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명훈이 세상에 대해 느끼는 자아 감각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상실의 고통에 더욱 예민하게 귀를 열고 숙고하게 만드는 인식과 감각의 토대로 자리매김하는 소설이다.
「손」은 손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인데, 손의 사회학으로도 손색이 없는 소설이다. ‘내 손가락에 장해를 입힌 건 손가락의 기능을 높여 주기 위해 만들어진 기계’였다는 말은 산업화 사회의 폐부를 찌르는 전언이면서, 사회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신체에 깊이 각인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엄지손가락이 잘린 손이 개인의 지각을 넘어서는 거대하고 불가지한 힘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무방비로 견뎌야 하는 화자의 심리적 묘사가 압권이다. 복부에 손가락을 심은 장면은 작가가 불가지한 세계를 이해하기 쉬운 형태로 나타내는 나름의 방법으로 활용하고 있어, 소설의 거리감을 당기고 있다. 자기연민 없이 어떠한 수동적 정념에도 흔들리지 않으면서 엄지손가락 소멸의 공포를 견디는 화자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표제작인 「10cm」는 서른네 살의 영상의학과 의사 윤주와 그의 연인이자 선배 의사인 경민의 이야기이다. 골육종 초기인 경민에게 수술을 권하는 윤주와, 그럼에도 양성종양 환자를 수술해야 하는 경민의 고민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인다. 소설은 ‘10cm’라는 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의미론적 그물망을 아주 촘촘하게 기워내어, 그 안에서 발견하는 삶의 숨결을 재발견하고 있다. 그 현장이 자칫 비현실적으로 비칠 수도 있는데도 작가는 나름의 민감하고 예리한 통찰력으로, 그 현실에 맞서는 자아의 응시를 적절하게 그려내고 있다.
「선線」은 돌연사한 친구의 장례식장에서 그의 마지막을 지킨 여성을 보는 순간 덮치는 감정에 몸을 가누지 못하는 남자가 화자이다. 표면적으로는 육체의 욕망적인 사랑에 관한 소설로 보이지만 몸에 대한 자각을 순도 높게 표현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몸의 통제 불가능성에 대한 공포스러운 자각과, 몸 안에 살아 숨 쉬는 그 욕망에 뒤섞인 체념과 비감을 잡스러움과 섞어 형상화한 것이다.
「은밀하게」는 화장실 있는 집에서 사는 게 소원인 남자의 이야기이다. 어머니, 아버지라는 불변의 가치에 대한 믿음과 환상이 무너진 곳에서 자라온 화자의 고립된 자아의식을 절대화한 소설이다. 개인의 행복이 절대 가치가 되었다는 신부님의 말을 ‘은밀하게’ 들으려는 나의 심리는 태아에게 나쁜 농약을 훔치는 행위와 맞닿아 역설적으로 인간의 존엄을 발견하는 중요한 순간으로 작용하면서 우리 사회에 대한 진지한 고민으로 읽힌다.
「낯선 봄」은 코로나19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실감 나게 묘사하고 있다. 코로나19 위에 덧씌워진 온갖 관념 덩어리는 걷어내고 긴박하고 비정하게 바이러스를 견뎌야 하는 인간의 모습을 리얼하게 보여준다. 바이러스 앞에 속수무책으로 내던져진 인물의 고독과 공포 속에 숨어 흐르는 주변 상황과 특성을 감정이 배제된 건조한 어투로 들려준다. 이런 화자의 어투는 소설의 인물들이 보이는 모습이나 태도와 정확히 조응해 그 울림의 폭이 크다. 금방이라도 밖으로 터져 나올 것 같은 절망과 공포를 억눌러 가라앉히려는 안간힘과 갈등하면서 만들어 내는 조용하고 격렬한 내면의 긴장이 영화의 한 장면들처럼 선명한 이미지로 다가온다.
이현신 작가의 소설집 『10cm』는 인간과 현실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과 문제의식을 통해 삶에 대한 깊이 있는 감응과 통찰을 제공하면서도 치열한 자아탐구를 포기하지 않는다. 인물들은 강제된 고단한 삶의 횡포를 고정된 것으로 감내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맞서며 자아를 표현하는 방법을 체득하면서 실천하고 있다. 어느 것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존엄한 개체로서 냉혹한 삶을 견디고 있는 다양한 삶의 모습을 예민하게 포착하면서도, 개인과 개인 사이의 미세한 틈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사회적 상상력으로 조각해가는 작가의 손길은 우리에게 반성적 감각의 능력을 강하게 촉구하고 있다.
이현신 소설가
이화여자대학교 문리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제14회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
번역서 모래 알갱이가 있는 풍경.
공저 거짓말 삽니다, 혼자 괜찮아, 미니픽션, 2020 신예작가.
현) 한국소설가협회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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