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동시가 시다
윤제림 동시집 『거북이는 오늘도 지각이다』, 문학과창작 2018년 겨울호
소설가 이용범이 시인 윤제림이 쓴 동시를 읽고 지난 9월 21일자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글을 올렸다. 윤제림은 하루 전 이용범에게 막 출간한 『거북이는 오늘도 지각이다』를 선물한 모양이다. 이용범은 여러 사람과 술잔을 나누며 동시집에 실린 작품을 읽고 배꼽을 잡았다고 한다. 이용범과 주위 사람들이 배꼽을 잡게 만든 작품은 「삼촌도 사람이 아니다」이다. 24쪽.
엄마한테 꾸중을 들었다
“사람 좀 되어라”
나는 아직 사람이 아닌가?
그래서 할머니는 나를
강아지라 부르는 걸까
나는 그렇다고 치자
삼촌은 뭔가?
오늘도 끌끌 혀를 차시며
할아버지 하시는 말씀
“저거 언제 사람 되려나”
이용범은 “동시가 꼭 선배의 평소 말투를 닮았다”고 했다. 윤제림은 목소리가 크지 않고 말을 느리게 한다. 그러나 말 속에 굵은 동아줄 같은 심지가 있어 거기에 이끌리는 뜻이 웅혼하다. 그가 하는 말은 대부분 진심을 담았기에 지나쳐 들어서는 안 된다. 시를 읽고 웃음 다음에야 느낄 일이지만 사람이 품은 무게가 버겁고 사람됨이 세상 빛 바라보는 자의 과업임을 알겠다.
윤제림은 우리 시대를 갈음하는 큰 시인이다. 그러므로 그의 요령을 본받아 글을 쓰려는 후학도 없지는 않으리라. 그러나 윤제림의 목소리를 흉내 내어 글을 쓰기가 쉽지는 않다. 읽는 사람이 숨을 쉬듯 불편함을 모르게 적어나간 그의 문장은 조탁의 결과다. 깊숙한 고민과 성찰이 여러 세월 내려앉은 송엽의 더께, 그 품안에서 자생한 결과이기도 하다.
윤제림은 뛰어난 산문가이기도 하다. 2015년에 낸 『고물과 보물』은 좋은 본보기이다. 필자는 이 책의 서평을 쓸 때 그와 몇 마디 섞었다. 시인의 산문 쓰기에 대해 묻자, 그는 청나라 시인 오교(吳喬)를 인용했다. “산문은 밥이요, 시는 술이다.” 지난 10월 22일에는 시인이 동시 쓰는 일을 물었는데, 설명을 길게 들었다.
“나에게는 시와 동시의 경계가 없다. 이건 어린아이라도 알아듣겠다 싶으면 동시로 쓴다. 이건 아이들이 듣지 않았으면 좋겠다 싶으면 시로 쓴다. 좋은 동시는 시다. 소월의 시 「엄마야 누나야」를 생각해 보라. 어려운 곳이 있는가. 사실 진리에 가까운 깨달음은 얼마나 유치하며 당연하고도 단순한가.”
시인에게 독자가 꼭 읽었으면 하는 작품이 무어냐고 물었다. 윤제림은 얼른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동시집 제목을 「봉구 할아버지 커다란 손」(36~37쪽)이나 「누가 더 섭섭했을까」(76쪽)로 정하고 싶었다.”고 했다. 필자는 독자에게 어느 작품을 읽어줄까 고민하다가 「누가 더 섭섭했을까」를 골랐다.
한 골짜기에 피어 있는 양지꽃과 노랑제비꽃이
한 소년을 좋아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소년이 양지꽃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반갑게 인사를 했습니다.
“안녕! 내가 좋아하는
노랑제비꽃!”
양지꽃은 온종일 섭섭했습니다.
노랑제비꽃도 온종일 섭섭했습니다.
저자: 허진석
허진석 시인은 서울에서 태어나 동국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1985년 시집 『타이프라이터의 죽음으로부터 불법적인 섹스까지』(1994년), 『X-레이 필름 속의 어둠』(2001년), 『아픈 곳이 모두 기억난다』(2019)를 상재하였고 2020년 제33회 동국문학상, 2023년 한국시문학상, 2024년 한반도문학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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