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은
등단 이후 겉치레 없이 진솔하고 명쾌한 작품을 발표해 온 김영두 작가가 술을 제재로 하는 열 편의 단편을 모은 연작소설집이다. 주로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작가를 지칭하는 이미지가 겹쳐지는 이 소설은 명쾌한 문장 구사와 과감한 일탈의 행위로, 같은 듯 다르고 다른 듯 같아 보이는 인생의 문제를 관측하고, 술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물음과 해석 그리고 융합을 시도한다.
표제작 「술꾼, 글꾼 우러러 그리되리라」는 주인공이 술과 주점 풍경에 대한 호기심으로, 그 체험 유혹의 실제에 도전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나는 여고 최고 학년이던 해에 요란스러운 변장을 통해 카페 진입을 시도해보지만, 번번이 문전박대를 당하고는 하루빨리 어른이 되고 싶은 조급증을 느낀다. 그러던 차에 나보다 나이가 한 살 더 많은 친구에 묻어 간신히 카페 진입에 성공하면서, 수많은 칵테일과 주점의 풍속을 헤아리게 된다. 술의 종류와 그 다채로운 기능이 인생에 끼치는 영향을 체득하며, 술을 향한 도발적 학습자로서 현장실습에 충실하던 나는 술과 관련된 글을 꼭 한번 써보겠다는 욕구까지 챙기게 된다, 드디어 작가가 된 나는 최인호의 「술꾼」을 소환하며, 어쩜 그 작품은 이미 중학생 때 쓴 게 아닐까, 하는 추정도 펼쳐보면서 인간이란 그렇게 나이와 정비례하여 성장하는 동물이 아님을 생각한다.
「굿바이, 슈퍼맨」은 친구 쌍둥이 오빠 지후와 낚시터에서 시작된 미묘해진 우정이 이따금 연정의 감정과 섞이면서 연출해내는 카멜레온 색채 같은 이야기이다. 이 소설은 남녀 간의 우정 역시 애정을 뛰어넘는 견고한 가치와 발언권을 가지며, 결코 인간의 고적한 선택을 임의로 예단해서는 안 된다는 권고 메시지를 담고 있다.
「돌아온 첫사랑, 성찬포도주』는 할아버지를 위해 최음제와 맞먹는 두견주를 빚는 할머니 덕에 이따금 불로 장생주를 맛보며 자란 나와 술과의 인연을 이야기한다. 광속에서 익어가는 각종 비주(秘酒)들의 발효음(醱酵音)과 더불어 후각을 간질이는 술내는, 어른의 세계를 더욱 호기심으로 이끄는 조숙의 기폭제가 되고, 이미 환각적인 주기에 익숙해진 나는 어느 크리스마스날 급기야 미사에 쓸 핑계로 할머니로부터 포도주 한 병을 얻어서는 언니들과 함께 잔치를 벌인다. 공식적으로 마실 수 있었던 그 성찬포도주는 은은하고 감미로운 첫 키스의 의미로 남게 했고, 그 농도는 점차 갈급을 키우는 마약 같은 유혹으로 업데이트가 되어, 나에겐 각종 술에 대한 도전 의욕을 키우는 첫사랑이 되었다는 술 예찬 이야기이다.
「타임캡슐,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는 연인들이 스스로 완성해내지 못한 로망을 흐르는 시간에 묶어두고, 그 추억들을 전설로 보존하는 이야기다. 박 화백이 술친구인 나와 함께 개봉하기 위해 막걸리와 위스키를 묻어 둔 도봉산 타임캡슐은 갑작스러운 날씨의 훼방으로 개봉을 이루지 못한다. 그리고 그 기약은 박 화백이 급서를 당하면서 영원히 가슴에 담는 낫킹콜의 노래가 되고 만다. 땅속에 묻힌 채 주인공을 기다리는 위스키의 진내가 흙무덤의 후각과 함께 가슴을 아릿하게 하는 작품이다.
「그리운 분 찾아드립니다」의 나는 전통 보수 집안의 규수로 자라 제일 먼저 결혼을 한 어느 동창 친구를 수소문해 20년 만에 조우한다. 그녀의 남편은 내가 먼저 알고 있었던 남자이고, 현재는 단편 영화 감독이어서 나는 그의 제안으로 한 소품의 게스트가 된 경력도 가지고 있다. 둘은 미처 내가 눈치도 못 채고 있는 사이에 콩깍지를 뒤집어쓰고 짝을 이룬 관계였다. 둘의 결혼식 날 나는 눈물이 섞여 도수가 낮아진 소주만 축낸다. 20년 후에 만난 친구의 술회는 그들의 불행을 예단한 내 추정과는 전혀 다르다. 슬며시 약이 오른 ‘나’는 조심스럽게 친구의 남편이 천하의 난봉꾼이고 바람쟁이라고 일러바치지만 친구는 철저히 남편을 신뢰하고 나를 ‘나압쁜 년!’이라고 공박하고 떠나버린다. 생애 처음이란 단서가 필요 없이 열 번 스무 번째의 만남도, 상대가 바뀌면 초련(初戀)이라 여기는 연인들은 언제나 그 첫사랑에 목이 마른 요지경 세상에 술은 꼭 필요하다.
「폭탄주보다 과하주(過夏酒)」의 나는 작가인데 말술의 애주가인 출판사 대표가 충수염 절제 수술 후 1년간을 금주하라는 의사의 말을 50일째 지키고 있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러자 나는 어금니 발치 후, 하루도 지나지 않아 위스키를 마신 기억을 자랑하면서 그때 입속 어금니에 물려있던 약솜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순간 기겁한 에피소드도 들려준다. 이렇듯 온갖 명분과 구실을 동원해서라도 금주를 결심한 이의 무장 해제를 강권하는 술친구들은 과연 무엇인가 생각하게 만든다.
「보드카 마티니, 젓지 말고 흔들어서」는 ‘주(酒)님’을 알현하러 가자는 친구의 유혹을 받고, 점심 반주로 소주 몇 잔을 마신 뒤 미어터지게 주객이 몰리는 유명 카페에서 2차를 도모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생동감 있게 그리고 있다. 복잡 다양한 주법이나 칵테일이 동원된 서사의 마무리가 담백한 작품으로, 술은 이따금 섬망을 일으키지만 어떤 경우에도 그 본질만은 변하지 않는 것을 증언한다
「앗싸, 세라비!, 그것이 인생이지 머」의 나는 단골 칵테일바 바텐더가 코로나 확진자가 되어 나를 신고했다는 급보를 받고는 폭발 직전의 수류탄을 껴안은 기분이다. 결국 양성 판정을 받고 구급차에 실린 나는 내심 코로나를 한 번 모험처럼 겪어보고 싶어 했던 입장이어서, 그 경험을 허구에 엮어 근사한 연애소설 한 편을 그려낸다는 고독한 설레임도 가져본다. 화자인 작가가 역병의 과정에서 겪는 인간 내면의 면피 도모적인 위선적 속성들을, 한없이 가벼운 존재의 인간들을 정탐하고 있다는 점에서, 진솔한 인생 문답의 보고서 같은 작품이다.
「모히또에 가서 몰디브나 한잔할까?」는 역병의 공포를 주제로 한 절묘한 콩트 형식에다 아름다운 환상을 순식간에 뒤집는 반전까지 보여준다. 모히또에 가서 몰디브를 마신다는 얘기는 꿈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지만 우리 인생은 절벽에 떨어지면서도 꿈을 가질 권리가 있다. 자주는 아니더라도 간혹 그 꿈이 이루어지는 기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남녀 간의 사랑 문제는 어떤 알고리즘의 공식으로도 쉽게 풀기가 난해한, 영원한 인생의 숙제라는 것을 훌륭하게 들려준다.
「브랜디 한 스푼, 설탕 한 스푼, 보리차 한 스푼」은 아주 짧은 글로 코로나 환자인 내가 병원에 갇힌 뒤 룸메이트로부터 얻어 마신 모과주로 역병을 극복해 나가는 소설이다. 모든 행동에 제한을 받는 병실은 그야말로 지옥 생활이다. 그런데 옆의 환자는 딸이 비밀리에 챙겨 준 모과주로 쉽게 수면을 취하고 있다, 그의 도움으로 CCTV 감시를 피해 화장실에서 몰래 모과주를 마실 때에야 나는 영국에서 첫 아이를 낳은 친구가 의사의 민간요법에 따라 꼬냑, 설탕, 보리차 한 스푼을 섞어 마시며 수면 장애를 해소한 것과, 일본에서 동일한 고난을 겪고 있던 또 다른 친구에게 그 정보를 전해준 사실을 떠올린다. 한편 같은 날 제주도에서 격리 수용되었던 카페 바텐더가 이미 그 묘약을 통해 구금 해제된 소식은 다리가 네 개 달린 현대판 처용의 사진이다. 새삼 술의 특별한 용도를 떠올린 나는 “나도 빨리 병 나아서 쿠바 해변에 갈 거야. 함께 동행할 길벗도 구해놨어. 가서 몰디브, 아니 모히또 마실 거야.”라고 중얼거린다. 술의 뛰어난 약리작용에 대한 찬사에 다름아니다.
이렇게 술이라는 제재로 특화된 이야기는 작가 나름의 취향과 탐색에 따른, 다양하고 다채로운 창조 담론으로 생광(生光)스러움을 담고 있다. 그 서사 과정은 알코올처럼 가식 없이 진솔하고, 인습과 관념이 만들어내는 장치를 걷어낸 만큼 문장이 탄탄하고 절제되어 있다.
김영두 작가의 연작소설 『술꾼, 글꾼 우러러 그리되리라』은 재미가 깊으면서도 속이 깊어 오래 감동이 남는 이야기이다. 김영두 작가는 언뜻 하찮게 보일 수도 있는 그 순간의 의미를 포착하고 살피는 작업을 통해 특유의 개성과 추진력이 담긴 야생의 소리를 계속 들려둘 것이다,
저자 김영두
군산출생 이화여대 졸업.
1988년 월간문학 단편소설 「둥지」 입선.
199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동화 「부소산 소년」 입선.
작품 통기레쓰, 기레쓰 푸른달 첫사랑 첫키스 미투 바다는 넘치지 않는다 다라국 라지아공주 우리는 사랑했을까 아담 숲으로 가다 대머리 만만세.
한국소설작가상, 시선작품상, 다라국문학상, 직지소설문학상, 계몽아동문학상 수상.
현)한국문인협회 소설분과회장, 현)한국소설가협회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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