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은
김영민 작가가 세 번째 펴내는 작품집이다. 소설집 『카모테스』에서 관조의 우아한 시선으로 독특한 미학적 효과를 보여준 작가는 이번 소설집 『종각역』에서 죽은 자(낯선 것)들과 산 자(익숙한 것)들의 기이한 결합의 환상성을 적절하게 보여주고 있다.
표제작인 「종각역」에서 나는 낮과 밤에 알바를 하면서 악착같이 살다 사고를 당해 죽지만 죽은 사실을 모른 채 이승과 저승의 중간지대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만난다. 익숙한 지명 때문에 한 번쯤 걸어봤을 그 ‘종각역’을 떠올리던 독자들은 그곳의 전혀 낯선 분위기에 호기심과 두려움을 느끼면서, 주인공이 죽었다는 사실을 점차 깨달으며 놀라움도 절정에 다다른다. 그래서 ‘종각역’이라는 익숙한 공간은 사건의 서술을 넘어서는 낯선 맥락으로 독자들을 압도한다. 죽은 자들의 공간 ‘종각역’은 당혹스럽고 충격적이면서도 놀라움과 안타까움이 뒤섞인 감정이입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닭집 언니」는 슬프고 상처투성이 풍경을 냉정하게 보여주면서도 가슴에 따뜻한 온기가 전해진다. 나는 비가 오는 날이면 닭집에 가서 가스 검침원 S, 닭집의 주인 언니 G와 함께 맥주를 마신다. 어느 날 S로부터 검침 갔다가 영감과 그 손자에게 성폭행을 당할 뻔했다는 이야기를 듣는데, 영감의 이부자리에 성인의 여자 인형이 누워있더라는 말에 놀란다. S는 얼굴에 진한 화장을 한 인형이 불쌍해 보였는데, 그 인형이 꿈에 나타나 도와달라며 울며 차라리 영감과 결혼을 시켜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은 G는 영감과 인형을 결혼시킨다. 알고 보니 젊어서 부자에 난봉꾼이었던 그 영감은 G의 엄마와도 염문이 있던 남자다. 나는 G가 이 동네의 토박이로 모친과 함께 창피를 무릅쓰고 온몸으로 부딪치며 살아온 이야기를 들으며 그때 뭘 하고 있었던 걸까 되돌아보면서, 인형의 ‘첫날밤’이라는 G의 말에 몸서리를 친다. 뭔가 세게 한방 얻어맞은 것 같은 묵직함이 더해지는 G의 회상은 이 소설의 압권이다. 안타까운 불안이나 두려움의 감정이 아니라, 시간을 되돌릴 수 없는 것의 스치는 듯한 체념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서 생기는 독특한 미학적 효과가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소설이다.
「라스베이거스를 떠나며」의 K는 운영하던 남성복 쇼핑몰을 폐업하고 오피스텔마저 정리한 후 무작정 라스베이거스로 간다. K는 혼자서 이틀간 라스베이거스를 돌아다니다가 술집에서 P를 만난다. P와 함께 끝이 없는 쇼핑타운을 걷던 K는 무심한 듯 능숙하게 스며드는 P를 따라 카지노로 들어가 100달러를 금방 잃고 만다. 돈을 딴 P가 K를 자신의 자리에 앉히지만 돈은 계속 빠져나가 순식간에 잔액은 0이 된다. 라스베이거스의 카지노에서 잭팟을 터트린다는 것이 헛꿈이라고 느낀 K는 조용히 귀국해서 바닥부터 다시 시작할 생각을 하며 일행과 함께 비행기에 오른다. 벼랑 끝으로 내몰린 어떤 절실함과 상처의 아픔이 시종일관 억제되고 정제된 언어로 잔잔하게 밀려온다. 그 억제가 가져오는 소설의 형상은 내몰린 삶의 현장에 대한 작가의 내밀한 응시와 성찰의 결과이다.
「빨간 머리 삐아프」의 삐아프는 대학로 반지하 소극장에서 연극 공연을 하는 배우이다. 작은 몸집에 어울리지 않는 큰 목청으로 프랑스 가수 ‘삐아프’를 닮아서 얻은 별명이다. 그녀는 쉬는 날이면 ‘헤나 염색방’의 화숙을 찾아가 수다를 떨었는데 하루는 화숙이 강아지 뭉치의 빨간 주둥이와 러그를 가리키며 영원히 변치 않을 것이라고 한다. 화숙은 헤나를 구입하면서 따라온 검은 씨를 심었는데 그것이 녹색넝쿨을 이루어 복숭아 향의 빨간 꽃이 피었다. 뭉치가 그것에 주둥이를 댔는지 주둥이의 붉은색이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화숙이 실습을 위해 인모가발에 염색한 붉은색에 반해버린 삐아프는 결국 그 꽃의 씨앗으로 염색을 한다. 하지만 머리에 염색한 붉은색이 지워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눈썹과 속눈썹 심지어 팔뚝에서 올라오는 옅은 털까지, 털이란 털 모두가 빨갛게 변한다. 화숙을 탓할 수 없다. 그녀는 부탁을 들어주었을 뿐이다. 화숙은 임시휴업을 하면서까지 붉은색을 없앨 방법을 찾아 고심한다. 미안한 삐아프는 화숙의 거처에 머무르면서 아침 준비를 한다. 오랜만에 누군가와 마주 앉은 아침밥상 앞에서 삐아프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렀고, 그 모습을 본 화숙도 덩달아 눈물을 글썽인다. 해결방법을 찾아낸 화숙은 삐아프가 싫은 것은 아니지만 같이 살고 싶지는 않다. 지방 소도시의 어느 작은 골목 같은 서울 변두리의 이 동네를 좋아하는 화숙은 염색방을 최대한 오랫동안 지킬 생각이다. 이 소설은 한 편의 독립영화를 보는 것처럼 장면 장면이 영화장면으로 다가온다.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붉은색과 그것을 통한 감각적인 이미지는 두 여자의 감정을 섬세하면서도 인상적으로 처리한다.
「삐이이」는 의식을 잃은 육체에서 빠져나온 나의 이야기이다. 여행작가 39세 남자인 나는 늦은 밤 횡단보도를 건너다 승용차에 깔렸고, 운전하던 여자는 죽은 모양이다. 그 여자는 나와 눈이 마주쳤지만 보이는지 안 보이는지 알 수 없다. 내 뒤를 따라 나온 여자는 급히 주차장으로 간다. 주차장의 흰색 소나타 앞에서 멈춘 여자는 남자가 통화 중인 앞 좌석에 앉는다. 통화를 듣고 있던 여자가 남자의 뒤통수를 후려치지만 허공을 스칠 뿐이다. 다시 장례식장으로 돌아간 여자는 자신의 사진 앞에서 울고 있는 어린 여자아이 옆에 주저앉는다. 나의 삶은 먼저 죽은 형의 몫까지 살아내야 하는 일종의 의무감이 곁들여진 삶이라는 생각을 하며 한강을 걷던 나는 살고 있던 오피스텔 808호실로 직진한다. 내 물건임에도 방안의 어느 것 하나 내 손으로 만질 수 없다. 냉장고의 기계음이 살아있는 생명체같이 반갑다. 나는 다시 병원으로 돌아간다. 여자는 아직도 병원 주차장에서 남편의 주위를 맴돈다. 병실에 누워있는 내 얼굴을 보니 이 세상에 그다지 미련이 없어 보인다. 만약 인생에 1에서 100까지의 수치가 정해져 있다면 그야말로 딱 50 같은 삶을 산 나는 그냥 쉬고 싶다. 그때 삐이이 강한 기계음이 들려온다. 살아오면서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디테일이 하나하나 모여 삶과 죽음의 응축된 현장을 집약한 슬픔의 냄새가 강렬하게 전이되는 작품이다.
김영민의 소설집 『종각역』에서 화자들은 삶과 죽음 그 환상성의 현장을 분명한 목소리로 들려주면서도, 지금도 서울 변두리 골목을 지키면서 살아갈 것 같은 소시민의 정서를 담백하게 그리고 있다. 파편적인 서사와 시·공간이 앞뒤로 잘려나가는 것은 곧 죽음의 터널을 건너가는 과정이고, 그 과정의 존재들이 얽히고설켜 들어가는 현실의 모습을 다층적이면서도 복합적으로 보여준다. 그런 다채로움은 김영민 작가 특유의 자각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소설집 『종각역』에서 작가는 그것을 확실하게 입증하고 있다.
<종각역> 종각 바로 옆 2층에 유명한 막걸릿집이 있다. 두부김치에 막걸리를 마시던 그 여인이 아련해지는 소설이다. (소설가 송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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