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문맹전쟁의 영웅들
칠십 평생 두렵게 셀렌 밤은 없었다.
한숨도 못 잤다. 그래도 새벽부터 준비를 서둘렀다. 옷장에서 가장 아끼는 한복을 꺼내 입었다. 하지만 금세 마음이 변했다. 결혼식 날도 아니고 잔칫날도 아닌데 한복은 어울릴 것 같지 않았다. 아들 결혼식 때 며느리가 해준 혼수 정장을 다시 입었다. 유명 백화점에서 큰돈을 주고 사준 옷이지만 검정색은 어울리지 않았다. 딸이 시집가며 마련해준 흰색 정장을 입었다. 동네 사람들 눈에 뛸까 무서웠다. 새벽 6시부터 9시까지 옷을 입어보고 벗길 수십 차례나 했다.
급한 대로 화장을 먼저 하기로 했다. 거울에 대관령 배추밭 고랑처럼 주름이 가득한 이꽃님의 얼굴이 나타났다. 한 여자의 70년은 아름다움을 다 빨아 먹고 뼈에 앙상한 가죽만 남아있었다. 쇠가죽 같은 얼굴에 다시 꽃이 필까 고민되었다. 괜한 짓을 하는 것 같아 화장을 멈추고 시계를 보았다. 9시30분 문해학교 등교시간까지는 30분밖에 남지 않았다.
지금까지 자식들 낳아 잘 키우고 다 결혼까지 시켰는데 누가 알면 자식들 창피 주는 것은 아닌지 두려웠다. 아들딸이야 내 새끼들이지만 며느리, 사위가 안다면 부끄럽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식들이 더 부끄러워하며 기죽고 살지 않을까 걱정도 되었다.
그럭저럭 와인 색으로 입술도 윤기 나게 그리고 듬성듬성 희어진 눈썹도 숯덩이처럼 그리고 파운데이션으로 밭고랑 같은 주름도 메웠다. 머리도 단정히 빗고 마지막으로 무난한 회색 정장으로 깔끔하게 차려입었다. 남들 눈에 띌 거 같지도 않고 헐해 보이지도 않았다. 거실에는 반짝반짝하게 닦아놓은 검정 구두가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거실 소파에 앉아 구두만 바라보았다. 어서 나를 신고 나가라고 구두가 재촉하는 듯했다. 하지만 차마 소파에서 일어날 용기가 나지 않았다. 9시55분 문해학교까지는 5분이면 걸어갈 거리였다. 용기를 내 구두를 신고 현관문을 향해 돌아섰다. 가슴 깊은 곳에서 너울처럼 마음이 울렁였다. ‘다 늙어서 글은 배워 뭐하게?’ 다시 구두를 벗고 소파에 주저앉았다.
핸드폰에서 열시를 알리는 알람이 울렸다. 10시가 지났으니 등교시간도 지났지? 나는 포기하고 옷장을 열고 옷을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리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선생님이 걸어온 전화였다. 받지 않고 전화벨이 울리다 끊어지도록 기다렸다. 한 시간은 울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끊어졌다가 젖 달라고 우는 아이처럼 다시 울렸다. 마지못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이꽃님 어머니! 문해학교입니다. 왜 안 오세요?
-도저히 부끄러워서 못 갈 것 같아요.
-어머니 지금까지 부끄럽게 사셨잖아요. 이제부터는 당당하게 사셔야지요.
-늦기도 했는데 안 갈래요.
-어머니 걱정 말고 오세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대답할 틈도 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선생님하고 처음 한 약속인데 어길 수는 없었다. 나는 창피한 걸음으로 문해학교를 향해 걸었다. 육십여 년 전 처음 초등학교에 입학한 시절이 떠올랐다. 노란 손수건에 이름표를 붙이고 아버지가 사준 가방을 메고 입학식에 갔었다. 그때 동네 아이들의 부러움을 샀다. 아버지가 자전거로 등교를 시켜주었다. 그 시절은 자전거가 자동차와 같았다. 하지만 일학년을 마치지 못하고 학교 다니는 것을 그만두었다. 동네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않고 산과 들로 돌아다니며 집안일을 거들었다. 그들과 어울려 놀기 위해 공부를 포기했다.
선생님은 문해학교 문밖까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딸 또래나 되어보였다. 교실에는 한 명의 학생도 없었다. 빈 교실을 보자 덜꺽 겁이 났다.
-선생님 저도 안 다닐래요.
-어머니가 다니면 다른 어머니들도 나온다고 약속했어요?
-정말입니까? 내가 다니면 다른 할머니들도 나온다는 말이?
-내일이면 아시게 될 겁니다.
선생님은 이름을 칠판에 썼다. 나는 선생님의 이름을 읽지 못하였다. 책상 아래로 고개를 숙였다. 당장 교실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다. 선생님이 또 뭔가를 썼다. 얼굴이 고추장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선생님이 매직으로 글자를 한 자 한 자 찍으며 천천히 읽었다.
-제 이름은 “김 수 화”입니다. 그리고 어머니 이름은 “이 꽃 님”입니다.
읽는 것을 듣고 선생님 이름은 김수화이고 나중에 쓴 것은 내 이름 이꽃님이라고 쓴 것을 눈치 챘다. 귀로만 듣고 살아온 70년 세상이었다. 그래서 모르면 눈치로 때려잡고 살아왔다.
나는 내 이름을 보고 신기했다. 저렇게 쓰면 이꽃님이라고 불러주는구나 생각했다. 어느 누구에게도 글자를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다. 아들딸도 모르게 살아왔다. 남편에게도 숨기고 70년을 살았다. 그래서 평생 쉬지 않고 일하고도 돈은 항상 남편 통장으로 들어갔다. 어디에 얼마를 쓴지 물어보지도 못했다. 남편은 돈을 어디에 썼냐고 물으면 이유 없이 통장을 집어던지며 “그럼 당신이 알아서 은행에 다니며 관리해!” 라고 소리쳤다. 그때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입을 다물었다. 선생님이 국어책과 수학책을 주었다.
-어머니! 이 책 두 권만 배우면 세상의 온갖 신기한 것을 모두 볼 수 있습니다.
-선생님! 70년을 캄캄하게 살아왔습니다. 제 이름을 쓰는 것이 마지막 소원입니다.
-오늘은 첫날이니까. 이름 석 자 “이꽃님”만 배우고 가세요.
선생님은 연필 다섯 자루를 예쁘게 깎아주고 공책도 한 권 주었다. 그리고 공부가 시작되었다. “이꽃님” 평생을 들어온 이름이지만 쉽게 읽어지지 않았다. 선생님은 끈질기게 읽었다. “이” “이” “이” “이” “이”......
“꽃” “꽃” “꽃” “꽃” “꽃”......
“님” “님” “님” “님” “님”......
수백 번 선생님을 따라 읽었다.
-이제 어머님이 한 번 읽어보세요.
-이! 꽃! 님!
-어머니 너무 잘 읽으셨어요, 정말 빨리 익히시네요. 금방 배울 거 같습니다. 참 잘하셨어요.
선생님의 칭찬은 나를 날아가게 했다. 내 이름을 읽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선생님은 소리 없이 글자만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 “꽃” “님”, 이 꽃 님, 이꽃님.
선생님이 박수를 쳤다. 글자를 한 번도 읽어보지 못한 까막눈에서 새로운 눈물이 흘러나왔다. 가슴이 터질 듯 70년의 한 맺힌 눈물이 솟아났다. 눈물은 뜨거웠다. 눈물이 그칠 때가지 오십이나 되었을 선생님이 통통한 얼굴에 미소를 꽃향기처럼 뿜어내며 조용히 기다렸다.
-어머니 오늘은 그만하고 내일은 이름 석 자 “이꽃님” 쓰는 것을 배울게요.
-선생님 안 됩니다. 오늘 이름 쓰는 것까지 배우고 싶습니다.
선생님은 다시 이꽃님을 크게 칠판에 적어놓았다. 그리고 나를 보고 공책에 똑같이 그려보라고 했다.
-“이”는 동그라미를 그리고 작대기를 쭉 그어주세요. 그리고 “꽃”은 낫 두 개를 놓은 것처럼 그리세요. 그리고 땅에서 새싹이 하나 올라온 것처럼 그리세요. 다음은 또 작은 새싹을 하나 그리고 뿌리를 양쪽으로 그려주세요. “님”은 낫을 옆으로 놓고 작대기를 하나 그리고 마지막에 네모를 그리면 됩니다. 이렇게 자음과 모음으로 모든 글자를 쓰고 읽을 수 있습니다.
선생님은 지렁이처럼 그린 것을 보고 참 잘 썼다고 계속하여 칭찬했다. 내가 웃는 것을 보고 칭찬을 멈추고 다시 한 번 써보라고 했다. 나는 그리고 그려도 쉽게 써지지 않았다. 만약 내가 남편에게 물었다면 단 한번 만에 포기하고 소리쳤을 것이다. 아들딸에게 물었다면 두 번은 알려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 번 이상 가르쳐줄 놈은 없었다. 모두 화를 내고 도망갔을 것이다. 선생님은 끝까지 웃으며 수백 번을 반복하여 가르쳐주었다. 이름 석 자가 뭐가 그리 어려운지 계속해서 틀리자 나도 나에게 화가 났다. 하지만 선생님은 끝까지 얼굴을 찡그리지 않았다. 그녀는 지독한 참을성의 천사였다. “이”를 쓰고 “꽃”을 쓰고 “님”을 꼬박꼬박 써내자 선생님이 나를 안고 함께 울었다. 환희의 눈물이 난생처럼 솟아나왔다. 가슴이 벅차도록 시원했다. 공부가 끝나고 문방구에 들러 필통을 하나 골랐다.
-할머니! 손자들은 만화주인공 그림 좋아해요.
-그럼 손녀 애들 좋아하는 것으로 하나주세요.
나는 가방을 고르려다 그만두었다. 문방구 아주머니가 묻는 것이 무서웠다. 곧장 집으로 와 오래된 청바지를 뜯어 사각다용도가방을 하나 만들었다. 그리고 남들 눈에 안 보이게 가방 안쪽에 바늘로 “이꽃님”이라고 자수를 놓듯 이름을 새겼다. 수백만 원짜리 명품가방보다 더 멋져보였다. 내 이름 석 자가 새겨진 물건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나는 저녁에 시장에서 오징어 한 마리를 샀다. 그리고 부침개를 부쳐 친구를 찾아갔다. 함께 공부하자는 소리에 박순희는 고개를 저었다. 이름도 못 쓰는데 가서 뭐하냐고 몸서리를 쳤다. 나는 내 이름 석 자가 적힌 공책을 펼치고 내 이름을 읽었다.
-“이” “꽃” “님” 어때? 나도 오늘 내 이름 배우고 왔어.
순희는 놀라며 다시 읽어보라고 했다. “이꽃님” 내가 내 이름을 읽는 것을 보고 쓸 수도 있냐고 물었다. 내 이름 “이꽃님”을 또박또박 썼다. 자기 이름도 써보라고 했다. 나는 얼굴이 홍시처럼 빨개졌다.
-아직 내 이름밖에 못 배웠어.
-꽃님아! 나도 내일 학교가면 내 이름 가르쳐줄까?
-그럼 우리 선생님이 얼마나 예쁘고 착한데. 천사가 따로 없다. 아무리 틀려도 절대 화 안 네.
박순희는 내가 함께 공부하자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친구와 함께 공부하게 되어 정말 기뻤다. 친구를 데려가면 좋아할 선생님을 생각하며 어서 날이 밝길 기다렸다. 선잠을 설치고 한 시간이나 먼저 등교했다. 선생님이 오기 전에 교실도 청소하고 칠판도 하얗게 반짝거리도록 닦았다. 그리고 9시 30분부터 문해학교 문밖에서 기다렸다. 선생님이 먼저 왔다. 그러나 10시가 되어도 친구는 나타나지 않았다. 순희네 집에서 10분이면 걸어올 거리였다. 핸드폰은 있어도 전화를 걸 수 없었다. 지금까지 걸려오는 전화만 받았다. 숫자를 몰라 아들딸에게 전화를 걸고 싶어도 걸 수가 없었다. 누구에게 전화를 걸어달라고 하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하지만 정말 다급하면 지나가는 젊은 사람들에게 부탁했다.
-젊은이 내가 눈이 안 보여 그러는데 010-1122-3344로 전화 좀 걸어주오.
내가 유일하게 외우는 딸 핸드폰 번호다. 딸에게 외우기 쉬운 번호를 받으라고 당부해 딸이 선택한 번호다. 남편이나 아들에게 전화할 일이 있으면 딸에게 전화를 걸어 전달하게 한다. 딸이 직접 하라고 투정부리면 전화번호를 모른다고 둘러댔다.
순희가 오지 않아 심장이 쿵쿵거렸다. 나는 친구 집으로 달렸다. 친구는 집에서 옷을 입고 망설이고 있었다. 부끄럽고 창피해 도저히 못가겠다고 생떼를 썼다. 나는 무작정 손목을 끌고 학교로 왔다. 우리는 20분이나 지각을 했다. 하지만 선생님은 반갑게 맞아주었다. 순희는 이름을 배우고 나는 아라비아 숫자를 1부터 10까지 배웠다. 친구는 얼른 이름을 배우고 아라비아숫자를 배우고 싶어 했다. 나는 자기 이름도 못 쓰면서 무슨 아라비아숫자를 배워하고 속으로 웃었다. 하지만 순희는 나보다 훨씬 빨리 이름을 읽고 썼다. 그리고 오후 시간에는 나와 함께 아리비아숫자를 배웠다. 우리는 선생님을 따라 읽었다.
-1 “일” 2 “이” 3 “삼” 4 “사” 5 “오” 6 “육” 7 “칠” 8 “팔” 9 “구” 10 “십”.....
무한 반복해 읽었다. 백번은 읽었을 때 선생님이 물었다.
-그럼 누가 먼저 읽어볼래요?
우리는 고개를 숙이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럼 이꽃님 어머니가 먼저 읽어보세요.
나는 한낮의 태양처럼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친구도 있는데 창피하게 나를 먼저 시켰다.
-일, 이, 삼, 사, 육.
-이꽃님 어머니 “오” 다음이 육입니다.
-오, 육, 칠, 팔, 구, 십.
이꽃님 어머니는 한 번 틀리고 다 맞았습니다. 참 잘했어요.
-다음은 박순희 어머니가 읽어보세요.
-일, 이, 사.
-일, 이, “삼” 다음이 사입니다.
-일, 이, 삼, 사, 오, 칠.
-오 다음은 “육”입니다.
-오, 육, 칠, 팔, 구, 십.
순희는 두 번이나 틀렸다. 그녀는 울듯 인상을 썼다. 나는 한 번밖에 틀리지 않아 기분이 좋았다. 모란시장 근처에 사는 김영순 친구가 생각났다. 내일은 그 친구를 데려오고 싶었다. 시청 앞에서 몇 번 버스를 타면 학교에 오는지 선생님에게 물었다.
-50번 버스를 타고 일곱 정거장 와서 내리면 우리 학교 앞입니다.
-선생님 내일은 모란시장 근처에 사는 김영순 친구를 데려올게요.
-어머니 많은 친구들하고 함께 공부하면 좋지요.
나는 집에 들러 남한산성에서 주운 도토리묵 한 덩어리를 검정 비닐봉지에 담았다. 모란시장까지는 항상 걸어 다녔다. 버스비가 없거나 아까워서가 아니었다. 버스는 줄줄이 오는데 어느 것이 몇 번이냐고 묻는 것이 싫어서였다. 두 시간은 걸어야 모란시장에 도착했다. 그 먼길을 왜 걸어 가냐고 물으면 건강을 위해 운동 삼아 걷는다고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내가 지독하게 돈을 아낀다고 수근댔다. 모란시장까지 걸으면 다리에 쥐가 나고 허리가 끊어질듯 아팠지만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정말 더 이상 못 걷겠으면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어느 것이 몇 번 버스인지는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버스기사에게 “모란시장 가요?” 하고 직접 묻고 타야했다. 젊은 사람도 더러 나처럼 기사에게 묻고 타도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하지만 나는 죄를 지은 것처럼 부끄럽고 창피해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1234도 모른다는 것이 얼마나 답답하고 죽을 지경인지 아무도 모른다. 글을 모른다는 것이 죽고 싶을 만큼 부끄럽고 창피한 일인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않는다. 이제 대한민국 사람 중에 글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다만 나이 많은 노인들만 가난해서, 여자라서, 일찍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학교에 못 다닌 것이다. 우리나라도 아프리카처럼 못 먹고 못 배운 그런 험난한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요즘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
김영순은 집에 있었다. 특별히 다니는 곳이라고는 동네의 빈 지하상가에서 화장지를 나누어주는 장사꾼들 행사에 찾아다니며 구경하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영순이 집에는 새로운 물건들이 많다. 옥장판이나 건강약품들이 여러 박스 있었다. 화장지 준다는 소리에 구경 가면 장사꾼들이 마지막에 비싼 물건을 강매하며 이름 쓰고 사인하라고 종이를 내민다. 그럼 이름 못 쓴다는 소리는 입에서 안 나온다. 그냥 “김영순이라 쓰고 알아서 사인하세요.” 장사꾼들은 횡재라도 한 듯 신나게 사인을 하고 물건을 집으로 배달해 주었다. 다음달부터 매월 고지서가 날아오고 생활비의 전부를 물건 값 갚는데 썼다. 어쩌다 찾아온 자식들은 쓸데없는 물건 사기 당했다고 큰소리치지만 오줌 싼 아이처럼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영순이는 절대 글 같은 것은 배울 생각 없다고 화를 냈다. 자기는 글 안다고 큰소리부터 쳤다. 글 모르는 것이 죽을죄를 지은 죄인도 아닌데 평생을 철두철미하게 숨기고 살았다. 나도 그랬지만 친구들은 더욱 부끄러워했다.
나는 김영순에게 모란시장 앞에서 50번 버스를 타고 일곱 정거장을 간 다음에 문해학교 앞에서 내리라고 종이에 크게 “오십”이라고 써주었다. 그녀는 내가 글을 쓰는 것을 보고 놀랐다. 친구가 놀라는 것을 보고 나는 가슴이 뿌듯했다. 내일 아침에 등교하겠다고 찰떡같이 약속했다.
다음날 아침 아무리 기다려도 김영순은 문해학교에 나타나지 않았다. 옆 동네 할머니들은 세 명이나 새롭게 입학해 공부를 시작했다. 각자 집에서 싸온 도시락으로 점심 먹을 준비를 하는데 영순이가 얼굴이 파랗게 질려 교실로 들어왔다.
-내가 버스를 잘못 타서 서울 가락시장시장까지 갔다 돌아오느라 늦었네요.
나는 달려가 그녀를 안으며 반겨주었다. 늦었지만 끝까지 약속을 지킨 친구가 너무 고마웠다.
-영순아! 고생했지?
-친구가 버스 번호까지 써줬는데 내가 멍청해서 버스를 잘못 탔네.
그녀는 부끄러운 웃음을 지으며 내가 써준 종이를 펼쳐보였다. 아직까지 한 번도 인상을 안 쓰던 선생님 얼굴이 굳어졌다.
- 이건 “50”이 아니라 “60”이라고 썼는데요. 이꽃님 어머니가 잘못 써주었네요.
나는 하늘이 노랗게 변했다. 선생님과 할머니 학생들이 모두 나를 노려보았다.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영순이는 화가 폭발했다.
-글씨 안다고 잘난 체 하더니 사람을 이렇게 개고생을 시켜?
나는 미안하다는 소리도 안 나왔다. 얼굴이 숯불처럼 벌겋게 달아올랐다. 선생님이 나섰다.
-김영순 어머니 제가 죄송합니다. 제가 적어드렸어야 했는데.
선생님이 사죄를 하니 나는 더 미칠 지경이었다. 김영순은 화가 풀리지 않은지 계속 소리쳤다.
-내가 배우면 너보다는 잘 알겠다. 선생님 저도 오늘부터 공부할래요.
그렇게 우리 반은 여섯 명이 공부하게 되었다. 옆 동네 할머니들은 모두 멋쟁이들이었다. 얼굴이 곱상하게 늙은 최영숙, 얼굴이 큰 장정임, 옷을 화려하게 입은 날씬한 한숙자가 그들이었다. 오후시간에는 선생님이 반장선거를 했다. 박순희 추천을 받아 내가 후보로 나섰다. 그냥 단독후보로 반장이 되는 듯한 순간에 옆 동네 최영자가 손을 들고 자기도 반장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선생님은 눈을 감고 손을 들어 결정하기로 했다.
-이꽃님 어머니가 반장을 했으면 좋겠다는 어머니 손들어주세요.
선생님은 칠판에 뭔가를 썼다.
-다음은 최영자 어머니가 반장을 했으면 좋겠다는 어머니 손드세요.
나는 눈을 뜨고 칠판을 읽었다. “이꽃님 3”이었다. 아래 이름도 “3”이었다. 칠판을 보면서도 최영자가 선생님에게 물었다.
-누가 반장이 되었어요?
-이꽃님 3표, 최영자 3표로 동률입니다.
옆 동네 한숙자가 큰소리로 떠들었다.
-최영숙 너는 니 이름도 모르는데 반장을 어떻게 해?
김영순이 말했다.
-그래도 글씨를 아는 사람, 꽃님이가 반장은 해야지요.
영순이는 화가 풀린 듯 내 편을 들었다. 다시 선거를 해서 4대 2로 내가 반장이 되었다. 최영자는 씩씩거렸다.
-이틀 먼저 왔는데 알면 얼마나 안다고 지랄이야!
오후에는 선생님 이름과 친구들 이름 쓰는 것을 배웠다.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면서 우리는 빠르게 친구가 되었다. 이름을 쓰면서 유치원 아이들보다 더 까르륵 대고 웃었다. 집에 갈 때는 내일은 무슨 반찬을 해오겠다고 서로 자랑했다. 자기 이름 석 자를 아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우리는 알았다. 세상에 당당하게 맞설 용기가 생기는 것 같았다. 다음날은 내가 처음으로 반장노릇을 했다. 수업시작하기 전에 일어나 구령을 했다.
-차렷!
-선생님께 경례!
아마도 대통령이 이런 기분일까 생각되었다. 선생님은 하루 종일 우리에게 아리비아 숫자를 100까지 가르쳤다. 두 번 다시 실수하지 않기 위해 나는 눈을 부릅뜨고 배웠다. 다른 사람에게 잘못 알려주는 것이 얼마나 큰 실수인가를 깨달았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속담의 뜻을 비로소 알았다.
선생님은 수업이 끝나고 우리에게 숙제를 내주었다. 은행에 가서 본인들 통장을 만들어오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상상도 못한 통장을 만들러 은행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혼자라면 용기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여섯 명이 뭉쳐 다니니 무서울 것이 없었다. 우리 반 친구들은 모두 이름 석 자를 쓰고 당당히 은행통장을 만들었다. 우리는 통장을 받아들고 기뻐 어쩔 줄 몰랐다. 이름 석 자만 알면 우리나라는 살아가는데 문제가 없을 듯싶었다. 나는 그 즉시 집안 구석구석에 숨겨둔 돈을 꺼내 은행으로 달려가 통장에 입금했다. 그리고 카드도 만들었다.
다음날은 모두 숙제 검사를 받았다. 선생님은 통장을 펼쳐보고 크게 놀랐다. 내 통장에는 삼백만 원이 넘게 입금되어 있었다. 친구들은 집안 구석구석 숨겨둔 돈을 찾아 모두 통장에 입금해 왔다. 박순희는 오백만 원도 넘게 입금되어 있었다. 그러나 김영순이는 십만 원도 안 들어있었다. 그녀는 물건 값으로 다 빼앗기고 모아둔 돈이 없었다. 두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원통해 했다. 옆 동네 장정임이 가장 돈이 많았다. 천만 원이 넘게 예금되어 있었다. 최영자도 오백만 원이나 들어있었다. 화려한 옷을 좋아하는 한숙자는 백만 원이 조금 넘게 있었다. 우리는 모두 부자였다. 젊어서부터 통장이 있었다면 수억 원씩은 모았을 거라고 아쉬워했다. 통장 하나로 잃어버린 삶을 어느 정도 되찾은 것 같았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이름과 전화번호를 서로 적게 하고 핸드폰 번호 누르는 법을 알려주었다. 모두 핸드폰은 있었지만 숫자를 몰라 전화 걸 줄은 몰랐다. 내가 먼저 전화걸기에 도전했다. 최영자 전화번호를 적어놓고 차례대로 숫자를 눌렀다. 갑자기 최영자 전화기가 울렸다.
-와! 이꽃님이라고 이름이 떴어!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보았고 최영자는 태어나 처음으로 목소리를 듣지 않고 누가 전화를 걸었는지 아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보며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었다. 박순희는 장정임에게, 김영순은 한숙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방에서 핸드폰이 울리고 환호성이 터졌다. 우리는 종일 서로에게 전화걸기로 수업을 마쳤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숙제를 주었다. 병원에 가서 물리치료를 한 번씩 받고 오라고 했다. 학교가 끝나기 무섭게 병원 접수대로 몰려갔다. 이름과 주민번호를 쓰고 접수하라고 했다. 은행에서 통장도 만들었는데 병원 접수는 식은 죽 먹기였다. 굳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간호사에게 이름과 주민번호를 써달라고 부탁할 필요가 없었다. 우리도 이제 아프면 마음껏 병원에 다닐 수 있게 되었다고 친구들은 춤을 췄다. 70년의 설움이 녹아내리는 듯했다. 수업 끝나면 날마다 병원에서 아픈 곳 치료를 받기로 했다. 우리는 몰려다니면서 육공주파라고 무시무시하고 귀여운 이름도 만들었다.
다음날은 등교하기가 무섭게 교실이 난리가 났다. 박순희가 신랑 핸드폰이 울려 전화를 받았는데 “영희” 라는 여자 이름이 떴고 자기가 받자 뚝 끊어버렸다고 했다. 순희는 궁금해서 신랑 통화내역을 봤는데 날마다 그 여자와 서너 차례나 전화를 한 기록이 있었다고 했다.
우리는 모두 흥분해 분명 애인일 것이라 했다. 수십 년을 사귀면서도 친구가 글을 몰라 잡지 못 한 것이라 했다. 순희는 울며불며 통곡했다.
-그 인간이 내 옆에 앉아 통화를 하면서도 누구냐고 물으면 동생이라고 들러대면서 바람을 피웠네. 내가 불쌍한 년이지 죽도록 일만 하면서 남편 바람피우며 돈 다 쓰는 것도 모르고 못 배운 것이 원통하지. 내가 누구를 원망해. 콱 두 연놈을 죽여 버릴 거야.
수십 년을 속고 살았다는 분통에 순희는 쉽게 진정하지 못했다. 선생님도 그녀를 달래려고 진담을 뺐다. 애인하고 통화를 하고 바로 옆에 전화기를 던져 놓고도 마음 편히 바람피운 남편을 죽이고 싶도록 밉다고 했다. 글을 몰라 남편에게 무시당하고 속고 산 것을 원통해 했다. 박순희가 울며 소리치는 바람에 수업도 못했다.
다음날 선생님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가족들 이름을 써보도록 가르쳐주었다. 한숙자가 아버지 이름을 쓰다 소리 없이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선생님이 등을 두드리며 물었다.
-어머니 왜 우세요?
-한국전쟁 때 아버지가 전사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어디 계시는데요?
-현충원에 묻혀 계셔요. 국가유공자거든요.
-다음 주가 현충일인데 우리 반도 현충원 추념식에 참석할까요?
-선생님 정말입니까?
-아버지 함자가 어떻게 되세요?
-한 자, 춘 자. 수 자입니다.
한숙자는 바로 눈물을 그치고 선생님과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바로 웃음을 찾았다.
-우리 아버지가 나 5살 때 전사하셔서 엄마 혼자 생계를 유지하느라 육성회비가 없어 학교에 다닐 엄두도 못 냈어요.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아버지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는데 나는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한숙자 어머니가 가장 훌륭한 아버님을 두셨네요.
선생님의 칭찬에 숙자가 환하게 웃었다. 선생님은 현충원 갈 때는 검정 정장을 입어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현충일에 우리 육공주는 검정 정장에 모두 까만 모자까지 썼다. 정부고위직 부인들이 추념식에 참석하는 것 같았다. 현충원의 군인들이 우리가 지나가면 로봇처럼 척척 받들어총을 했다. 한숙자가 아버지 묘소를 찾아갔다. 우리는 모두 흰 꽃다발을 하나씩 들었다. 숙자가 묘소에 도착해 꽃병에 꽃을 꽂았다. 우리도 꽃다발을 내려놓고 묵념을 했다. 우리는 손수건을 꺼내 비석을 정성껏 닦았다. 조금 늦게 선생님이 도착했다. 선생님도 까만 정장을 입고 왔다. 선생님은 꽃다발을 내려놓으려다 멈칫했다.
-한숙자 어머니! 여기가 아버지 묘소 맞나요?
-예 선생님! “한춘수” 라고 여기 쓰여 있잖아요?
-어머니 착각하신 거 아닌가요? 한춘구 님 묘소인데요?
-선생님 한춘수 우리 아버지 묘가 아니고 한춘구 묘라고요?
-네 어머니 분명히 한춘구 님 묘소입니다.
우리는 아무도 한춘수와 한춘구를 구별하지 못했다. 선생님은 현충원 관리소에서 군인을 데려왔다. 군인은 장부를 들고 와 여기저기 찾아 헤맸다. 그리고 우리에게 물었다.
-따님 성함이 “한숙자”가 맞습니까?
-예 제가 한숙자입니다.
-한숙자 님의 아버지 “한춘수” 님 묘소는 저기입니다.
군인은 우리를 옆에 옆에 묘소로 데려갔다. 그리고 이름과 비석의 이름을 서너 번이나 대조하며 확인했다. 군인은 우리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돌아갔다. 한숙자가 천천히 비석의 이름을 읽어 내려갔다.
-한. 춘. 수. 선생님! 여기가 분명하지요?
-네, 한숙자 어머니! 여기가 아버지 한춘수 님 묘소입니다.
한숙자는 비석을 껴안고 통곡했다.
-아이고 아버지 죄송해요. 아버지 이름도 못 읽고 70년을 다른 사람 묘소에 참배를 하고 갔네요. 우리 아버지 얼마나 섭섭하셨을까?
우리는 꽃다발을 다시 들고 와 진짜 아버지 묘소에 기도를 했다. 한숙자는 꽃다발 하나를 다시 가짜 아버지 묘소에 갔다 바쳤다. 나라를 구한 영웅은 모두 대한민국의 아버지라고 했다.
숙자는 선생님 덕에 진짜 아버지를 찾았다고 손바닥으로 가슴을 수천 번 쓸어내렸다. 그리고 선생님 손을 꼭 잡고 감사해했다.
현충원을 다녀온 다음부터 선생님은 한 달에 한 번씩 돌아가며 반장을 하도록 했다. 모든 친구들이 좋아했다. 본격적으로 한글을 배우면서 숙제가 많아졌다. 우리는 악착같이 공부를 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공부는 어려워졌다. 1학기를 마치며 받아쓰기 시험을 봤다. 선생님이 천천히 문제를 불렀다.
-1.아버지 2.어머니 3.사랑 4.꿈. 5.병원. 6.은행 7.친구 8.문해학교 9.모란시장 10.남한산성.
박순희는 100점을 맞았다. 나는 70점을 맞았다. 김영순은 90점, 장정임은 50점, 최영숙은 60점 그리고 한숙자도 100점을 맞았다. 꼴등을 한 장정임은 다시는 학교에 안 오겠다고 소리치며 울었다. 최영숙도 2학기에 나오지 않겠다고 했다. 나도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박순희와 한숙자가 커닝을 한 것 아니냐고 선생님에게 살짝 따졌다. 선생님은 절대 그런 일은 없다고 했다. 괜한 나의 심술이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짧은 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시작되었다. 모두 씩씩하고 건강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모두 자랑하기 바빴다. 거리의 간판이 보이고 도로의 안내판을 보면 어디로 가야하는지 알 수 있다고 했다. 이제는 버스 번호도 알아보고 잘 타고 다닌다고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조용히 우리들 얘기를 들으면서 선생님은 미소를 지었다. 최영자는 주민센터에 가서 공공근로사업도 혼자 신청했다고 하였다. 대신 신청서 써달라고 남자들에게 부탁 안 해도 되고 글 모르는 할머니들 신청서 써주는 자원봉사까지 했다고 자랑했다. 이제는 항상 공공근로신청기간이 되면 주민센터와 구청에 나가 신청서 작성해주는 봉사를 하겠다고 했다.
우리는 반년 동안 너무 많이 변했다. 세상이 눈앞에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그동안 우리들의 통장은 더욱 빵빵해졌다. 남편들의 통장이 훌쭉해지면서 신기한 일도 생겼다. 칠십 평생 설거지 한 번 안 하던 남편들이 청소도 하고 설거지도 하고 아내들 눈치를 살폈다. 육공주는 다시는 남편 통장에 돈을 넣지 않기로 했다. 통장에 돈이 쌓이면서 우리는 진정한 공주가 되어갔다.
2학기 들어 공부가 어려워졌다. 선생님도 밉도록 숙제를 많이 내주었다. 숙제를 틀리게 해가면 친구들 보기도 민망했다. 나는 공부 속도가 친구들보다 늦었다. 숙제는 날마다 틀렸다.
나는 항상 어디서나 일등이었다. 마트에서 줄을 서는 것도 일등, 밥을 먹는 것도 일등, 하지만 공부는 뒤처지고 있었다. 아프다는 핑계로 학교에 가지 않았다. 하루 이틀 빠지자 정말 학교에 가기 싫어졌다. 숙제를 많이 내준 선생님 때문이란 생각이 들면서 악마처럼 생각되었다. 문해학교는 감옥 같았다. 친구들은 나를 놀리는 원숭이들 같았다. 나는 공부를 그만두기로 마음먹고 국어책과 산수책 그리고 공책을 불태웠다.
선생님과 친구들이 집으로 찾아왔다. 커다란 케이크와 샴페인을 사들고 왔다. 나도 잊고 있었던 내 생일이었다. 일곱 개의 촛불에 불을 켜고 친구와 선생님이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주었다. 지켜보던 남편이 한마디 했다.
-당신도 이제 동창생과 선생님이 생겼네.
그 한마디에 눈물이 와르르 무너졌다. 남편이 초등학교 동창회간다고 했을 때 가장 서러웠다. 나는 연말이 되어도 찾아갈 동창회가 하나도 없었다. 친구들이 동창회 간다고 하면 정말 부러웠다. 나는 다시 누구보다 열심히 학교에 나갔다. 고맙게도 선생님은 책과 공책을 새 것으로 주셨다. 청바지로 만든 가방은 불태우지 않은 것을 천만다행으로 생각했다. 가방 안쪽에는 이꽃님이란 이름이 선명했다. 우리는 시화전을 끝으로 졸업을 하게 되었다.
시화전은 성남시청에서 열렸다. 나는 시장상을 받았다.
문해학교
이꽃님
이름 석 자도 모르고 어두운 세상 살았네
글을 한 자 한 자 배우고 거리의 간판이 보이네
신기한 눈을 주신 선생님 감사합니다.
책씻이는 내가 받은 상금으로 열었다. 근사한 갈빗집에서 한턱냈다. 나는 크게 소리쳤다.
-여기 메뉴판 주세요! 친구들 먹고 싶은 걸로 주문해!
-육공주는 메뉴판에서 식성대로 주문했다.
글씨를 몰라 짜장면하고 무작정 주문한 공주는 없었다.
-선생님은 뭐 드실래요?
-나는 짜장면 먹을게요.
-갈빗집에서는 짜장면 안 팔아요!
백설의 육공주는 발랄하게 떠들었다. 새해에 졸업여행으로 여권을 만들어 해외여행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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