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이모저모

문학의 길 역사의 광장 문학가 임헌영과의 대화 대담 유성호

소설가 송주성 2021. 10. 21. 14:01

나는 문학으로 역사를 성찰하고 역사를 문학으로 조명한다

 

문학의 길 역사의 광장은 문학평론가 임헌영과 유성호가 치열한 민족의식의 언어로 풀어낸 대화록이다. 이 책은 임헌영의 유년 시절부터 두 번의 수감생활을 거쳐 민족문제연구소장을 역임하고 있는 현재의 생애까지를 집약한 자전적 기록이기도 하다. 임헌영은 우리 문학사와 민족사에 큰 획을 그었으며 현재까지 왕성하게 활동하는 문학평론가다. 그는 친일인명사전(2009) 출간에 앞장서며 근현대사의 반성적 자료를 구축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한 문인간첩단 사건과 남민전 사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그의 인생을 따라가다 보면 어두운 시대를 앞장서서 걸어간 현대사가 그대로 드러난다.

유성호가 대담을 이끌어가며 조명한 임헌영의 생애는 한나 아렌트가 말한 어두운 시대를 밝히는 한줄기 빛과 같다. 광기와 야만의 세월을 살아낸 임헌영은 살아 있는 역사이자 역동적인 정치적 산물로서 문학작품을 바라본다. 그가 읽고 섭렵한 문학작품들에 대한 기억은 그 시대를 증언해주는 기록이다. 한평생 문학의 길을 걸어온 그가 말하는 문학은 역사 그 자체다. 낙관과 비관이 공존하는 우리의 역사를 돌아본다면 우리가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하는지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저명한 두 평론가의 대화 속에서 살아 숨 쉬는 문학과 역사를 만날 수 있다.

 

임헌영

 

1941년 경북 의성에서 태어나 중앙대 국문학과 및 대학원을 마쳤다. 현대문학을 통해 장용학론(1966)으로 문학평론가가 된 후 경향신문기자, 월간 다리, 월간 독서등 잡지사 주간을 지냈다. 유신통치 때 두 차례에 걸쳐 투옥, 석방 후 중앙대 국문과 겸임교수(2010년까지)를 지냈고, 역사문제연구소 창립에 참여, 부소장, 참여사회 아카데미 원장 등을 거쳐 지금은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으로 있다.

지은 책은 한국근대소설의 탐구(1974), 창조와 변혁(1979), 문학의 시대는 갔는가(1983), 민족의 상황과 문학사상(1987), 문학과 이데올로기(1988), 변혁운동과 문학(1989), 분단시대의 문학(1992), 우리 시대의 소설 읽기(1992), 우리시대의 시 읽기(1993), 불확실 시대의 문학(2012), 임헌영 평론선집(2015), 그리고 리영희 선생과의 대담을 엮은 대화(2005), 임헌영의 유럽문학기행20여 권이 있다.|||1964년 경기 여주에서 태어났다. 연세대 국문과와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9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문학평론으로 등단했다. 서남대, 한국교원대를 거쳐 현재 한양대 국문과 교수이자 인문대 학장이다. 저서로 한국 현대시의 형상과 논리, 상징의 숲을 가로질러, 침묵의 파문, 한국 시의 과잉과 결핍, 현대시 교육론, 문학 이야기, 근대시의 모더니티와 종교적 상상력, 움직이는 기억의 풍경들, 정격과 역진의 정형 미학, 다형 김현승 시 연구등 다수가 있다. 김달진문학상, 대산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목차

 

문학의 길 역사의 광장으로 초대하며·임헌영

 

1 카산드라의 비극

2 이러려고 나라를 되찾았나!

3 아버지와 형의 흔적을 찾아서

4 머리 둘 곳 없는 청춘이여!

5 5·16 쿠데타 학번의 대학생활

6 한국 문단 반세기 훑어보기

7 권력에 길들여지는 언론: 경향신문시절

8 박정희 군부독재 시기의 월간 다리

9 유신시기의 지식인들

10 고문과 간첩 조작의 기술자들

11 민족정신사를 담아내는 한국문학 정전 만들기

12 제국주의와 민족해방운동

13 국가폭력, 당신을 위한 나라는 존재하는가

14 우리 근현대사를 제대로 인식하기

15 오늘의 사상, 한길사와 더불어

16 생활글쓰기 운동과 한국산문

17 2의 반민특위,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

18 불확실시대의 평화를 위하여

치열한 민족의식의 언어로 풀어낸 대화록·유성호

 

출판사 서평

 

역사 격랑 속에서 꽃피워낸 문학의 길

문학은 아주 먼 곳을 그리워하는 연정 같은 것

임헌영은 아주 독특한 이력을 지닌 문학평론가다. 그는 80년의 세월 동안 식민지 시대, 해방과 분단, 독재와 항쟁을 끝없이 경험하며 역사의 격랑을 마주했기 때문이다. 다섯 살 때 8·15 해방을 겪은 그는 먼 친척인 규순 아재가 입영 영장을 받아 온 집안이 초상집 분위기가 되었던 일을 회상한다. 가족들의 걱정이 무색하게 아재가 떠나는 당일 해방이 됐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어린 임헌영은 김순남 작곡가의 해방의 노래를 신나게 따라 불렀다. 그러나 그해 9월부터 미국이 한국 방송과 신문 등 여러 매체에 관여하면서 한반도를 빠르게 장악하기 시작했다. 8·15 이후 남북을 막론하고 가장 시급했던 민족사적인 당면과제는 친일파 청산과 토지개혁이었지만 우리는 해방을 미국에게 도둑맞고 만 것이다.

그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19495월부터 8월까지 반민법 제정에 앞장서던 이승만이 미군 조기 철수를 주장하던 국회의원을 제거하기 위해 국회 프락치 사건을 조작했다. 결국 그해 626일에 백범 김구가 암살되었다. 그다음 해 보도연맹 관련자 검거령이 내려 그의 작은아버지가 감옥에 갇혔고 아버지는 동생을 구출하려고 갔다가 도리어 옥에 갇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임헌영은 폭풍우 같은 역사 속에서 어린 시절을 마감했다. 그의 많은 가족들이 역사와 함께 저물어갔고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시절 해방의 노래를 따라 부를 때부터 그는 역사의 무게를 몸소 실감하고 있었다.

그가 안동사범학교에 입학하던 1956515일에 제3대 대통령선거가 있었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기둥이자 민주당 후보였던 신익희는 반()이승만 투쟁을 위해 범야권 단일화를 구축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신익희는 선거를 앞두고 55일 심장마비로 서거했고 이로써 민족적인 양식을 지닌 야당은 막을 내렸다. 이러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임헌영은 학우들과 정치 상황에 대해 토론하며 문학의 길을 꽃피워나갔다. 그는 임대서점에서 하루에 책을 한두 권씩 매일 빌려보았다. 대중소설, 추리소설, 전기문학을 읽다가 순수문학과 세계문학에 발을 들여 가장 친한 친구와 늘 다양한 주제로 논쟁하곤 했다. 사범학교 졸업 후에는 어머니의 권유로 모교인 조문초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다가 4월혁명을 겪은 후 19611월 서울로 올라가게 되었다.

중앙대학교에 입학한 임헌영은 박완서의 소설 나목에 소개된 그림 행상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했다. 미군이 오후 5시에 일과를 끝내고 술집으로 갈 때쯤 막사를 돌며 스카프, 버클, 라이터 등에 애인 얼굴을 새긴 초상화를 보여주며 영업을 했다. 그러나 두 달 만에 군사쿠데타가 일어나 미군부대에 출입이 어려워지자 그는 아르바이트를 접고 학업에 매달려 대학원에 진학했다.

 

불확실시대의 평화를 위하여

촛불 하나라도 켜는 것이 어둡다고 불평하는 것보다 낫다

임헌영은 대학원생이던 1966현대문학에 조연현 추천으로 평론가로 등단했다. 대학원 졸업 후 그는 1968소년경향에 들어갔는데 적자로 폐간되어 주간경향에서 대중문화 관련 기사를 썼다. 그러던 중 최연소 국회의원으로 이름을 알린 김상현 의원이 설립한 출판사 범우사에서 1970년대 사회 현실을 신랄하게 비판한 잡지 다리지를 창간했다. 7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김대중 후보의 홍보 활동을 원천봉쇄하려는 독제체제의 음모 아래 다리지 필화 사건이 발생했다. 발행인 윤재식, 주간 윤형두, 필자 임중빈이 구치소에 수감되었다. 이 사건의 재판을 맡은 목요상 판사는 고위층에서 이 사건에 관심이 많다는 압박을 받았지만 세 구속자를 모두 직권보석으로 석방했다. 임헌영은 필화 사건 이후 1971경향신문에서 다리지로 옮겨가 많은 지식인에게 경종을 울리는 글을 실었다.

다리지가 폐간되고 중앙대 강사로 일하면서 임헌영은 문학에 전념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인 61인 개헌지지성명에 서명한 일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이 서명이 언론에 발표되자 1·8 긴급조치가 선포되었고 그는 몸집이 거대한 남자들에게 붙잡혀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그는 온갖 학대와 폭력을 당하고 밤에는 잠 한숨 자지 못하는 고문을 받아야 했다. 그들은 그가 재일동포 교양 월간지 한양지에 글을 쓰고 원고료를 받았으며 발행인과 함께 식사한 것을 문제 삼았다.

임헌영은 교도소에서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유미주의 소설을 탐독했다. 그는 고통을 통해 문학예술의 심오한 세계와 아름다움이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한양지와 관련이 깊은 문인들이 증인으로 증언해주고 나서야 풀려났지만 죄가 있어서 간첩이 되는 것이 아니라 조작될 수 있다는 사실을 직접 경험했다. 뿐만 아니라 그 사건으로 모든 직책과 사회 활동을 박탈당해 출소했음에도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정식으로 복권된 건 57세가 된 1998년이었고, 사건이 발생하고 44년이 지난 후인 20188월에 비로소 무죄를 선고받았다.

임헌영은 숨 막히는 유신 치하에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발 벗고 나섰다. 1975‘2·28 고문정치 종식을 위한 국회의원 선언을 김상현 의원이 주동했을 때는 동교동 김대중 사저에서 선언문을 직접 작성하기도 했다. 김대중은 뉴서울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19721017일 국회가 해산된 후 수사기관에 끌려가서 당했던 온갖 고문 사실이 낱낱이 담긴 고문정치의 종식을 위한 선언을 발표했다. 언론에서는 국회의원들이 당한 고문 사례를 끔찍할 정도로 자세히 다뤄 큰 파장이 일었다.

해방 후의 흐름은 주류문화와 대항문화, 친일문화와 민족문화, 식민주의 잔재 청산의 움직임이 길항하고 갈등하며 싸워온 역사였다. 임헌영은 이러한 1970년대의 최전선에 서 있었다. 그는 출옥 후 번역으로 생활을 이어나가다가 태극출판사에서 민족정신사를 아우를 수 있는 한국문학대전집을 기획했다. 정치인, 인문사회과학자들과 독립운동가들도 과감히 포함하는 민족사상대전집을 묶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 월간 독서19787월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