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요즘 잠들지 못하는 날이 잦아졌다. 많은 시간이 지나고 치료과정을 거쳤어도 몸은 기억을 잃지 않는다. 강한 통증이라는 말로 간단히 표기할 수 없다. 아마도 생명이 있는 한 통증은 영원히 기억되고 그녀를 괴롭힐 것이다.
후에 깨달은 것은 운명을 짊어진 채 태어난 것은 내 의지가 아니었고 그녀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고통을 이기는 길은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든 그들의 밑에 복종하는 길밖에 없음을 알았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가해자에게 사랑을 구걸해야 했다.
그녀를 세상에 있게 한 조물주와 싸우지 않고는 한시도 살 수 없었다. 탈출구가 없는 막다른 길에서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체념뿐이다. 언젠가 구세주가 나타나리란 희망으로 목숨을 부지한 나치시대 유대인들처럼 혹은 성서에 나오는 출애굽기에서처럼 끝없이 기다려야 왔다.
구세주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관계없다. 있지도 않은 신, 그 허상과 싸움이라도 하지 않으면 삶을 이어갈 수 없다. 지금부터의 기록은 생애 전체를 통해 신과 싸움으로 일관한 기록이다.
-‘프롤로그’ 중에서
이정은
소설가·본명 이수희.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 과정 졸업. 1989년 『월간에세이』에 수필 추천받고 1991년 『월간문학』 신인상에 소설 「부화기」가 당선되어 집필활동을 시작했다. 1994년 첫 소설집 『시선』을 출간한 이래 창작에 몰두하면서 이정은 만의 소설세계를 구축해냈다.
그의 소설은 간결한 문체와 삶의 시련과 고통에서 길어낸 정교하고 감동적인 서사로 평단의 주목과 독자의 사랑을 받고 있다. 등단하여 십여 년간 서양철학 연구반에서 문학철학을 공부했으며 꾸준한 작품 활동과 열정이 돋보이는 치열한 작가정신은 젊은 작가들의 롤모델이 되고 있다.
장편소설 『너의 이름을 쓴다』 『신화는 계속된다』 『태양처럼 뜨겁게』 『블루 인 러브』 『웰컴 아벨』 『매혹』 『그해 여름, 패러독스의 시간』 『플러스섬 게임』, 소설집 『시선』 『불멸의 노래』 『세상에 말을 걸다』 『피에타』 『불멸』 등을 펴냈다.
2011년 만우박영준문학상, 2012년 아시아 황금사자문학상 우수상, 2012년 들소리문학상 대상, 2017년 한국소설문학상 등을 받았다. 한국소설가협회 부이사장을 거쳐 현재 한국소설가협회 최고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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