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서울학생혁명
피의 화요일
4월 19일 화요일 아침 아홉시 수업을 시작하기 바로 직전이었다. 종로통에서 요란한 함성이 들리자 학생들이 창문을 열고 종로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서울 시민의 외침이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정, 부통령선거 다시 하라!
-다시 하라! 다시 하라!
나는 함성에 이끌려 운동장으로 달려나갔다. 내 뒤를 따라 우리 반 아이들이 우르르 뛰어나오고 1,2,3학년 전체 학생들이 운동장으로 몰려나왔다. 나는 교문 앞에서 거리를 살폈다. 경찰들이 곤봉을 휘두르며 무리지어 도망가는 학생들을 쫓았다.
대광고등학교 학생들이 종로를 벗어나 혜화동으로 도망쳤다. 그들은 학교가 있는 신설동로타리에서 데모를 시작해 동대문을 지나 종로로 들어섰다가 종로5가에서 경찰과 마주쳐, 곤봉으로 두들겨 맞고 피를 흘리며 흩어졌다. 손바닥으로 터진 머리의 상처를 누르고 쓰러진 학생을 두서너 명이 부축해 함께 뛰었다. 검정 교복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얼굴은 땀과 피가 함께 뒤엉켜 피투성이였다. 경찰들은 “이마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데모는 무슨 데모야!”소리치며 학생들을 추격했다.
교실에서 뛰어나온 차성원이 나를 보고 달려왔다. 그는 3학년 나는 일년 꿇어 2학년이지만 우리는 열아홉 동갑내기 친구였다.
-정태훈! 무슨 일이야?
-응, 대광고 학생들이 데모를 하나봐.
-왜?
-왜는 왜냐? 어제 고려대생들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3.15부정선거는 무효이다.’ 외치고 학교로 돌아가다 정치깡패들에게 쇠파이프로 폭행당해 수십 명이 부상을 당했잖아,
-그래서?
-대학생 형 누나들이 피 흘리며 고려대로 돌아가는 것을 본 대광고 학생들이 ‘하늘의 뜻을 따르고 인간을 사랑하자’는 경천애인 교훈을 실천하는 거지...
우리 학교 학생들은 학년 별로 운동장에 모였다. 각 학년 별로 다섯 학급 이백여 명씩 전교생은 육백 명에 달했다. 차성원이 학생들을 둘러보고 결심한 듯 나를 바라봤다.
-정태훈! 우리도 해야지?
-차성원! 우리 학교의 교훈이 “바르게 살자. 부지런 하자. 서로 도웁자.” 아니냐?
차성원이 전교생을 향해 소리쳤다.
-우리 흥국고(현, 동국대학교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는 자유, 민주, 정의를 위해 싸우자!
성원이는 공부도 잘하고 싸움도 잘했다. 학교생활도 적극적이라 우리 학교 학생 중에 3학년인 그를 따르지 않을 학생은 없었다. 성원이와 내가 앞장서 교문 밖으로 나서고 육백여 명의 전교생들이 종로를 향해 뛰었다. 종로5가까지 450여 미터에 불과했다. 5가에서는 대광고 학생들이 경찰과 대치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우리 학교 학생들이 합류하고 곧이어 덕수상고 학생들이 몰려나오고 동성고등학교 학생들이 합류하면서 교복을 입은 수천 명의 고등학생들이 종로5가를 가득 메웠다. 학생 수가 늘어나면서 경찰들 저지선이 뚫리고 뒤로 물러서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경찰은 종로3가에서 미군에게 불하받은 윌리스 44년식 경찰백차로 저지선을 치고 곤봉을 휘두르며 마구잡이로 학생들을 연행했다. 곤봉에 맞아 피를 흘리는 자식 같은 학생들을 지켜보던 시민들이 시위대에 합세하면서 경찰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우리 고등학생들은 어깨동무를 하고 들소 떼처럼 광화문을 향해 행진하면서 목이 터져라 구호를 외쳤다.
-이것이 민족적 민주주의 이드냐?
-부정선거 다시 하자!
-기성세대는 각성하라!
고등학생들이 광화문을 향해 행진하는 동안 오전 10시경 종로5가에서 1킬로미터 떨어진 서울대 학생들이 합류하고 계속해 국민학생과 남녀중학생 그리고 광화문 근처의 남녀고등학생이 합류했다, 이어서 중앙대와 고려대, 건국대, 경희대, 성균관대, 연세대 등 서울의 대학생들이 데모에 동참했다. 일반시민들까지 합류하면서 종로는 버스와 승용차 그리고 수만 명의 시민들이 뒤엉켜 ‘정, 부통령 선거 다시하자’ ‘민중 역적 몰아내자’ ‘자유 정의 진리 드높이자’ 등의 현수막을 들고 행진했다.
나는 그렇게 많은 시민들이 종로를 채운 것은 처음 봤다. 여학생들의 하얀 카라 교복이 당연 나의 눈을 사로잡았다. 한 여학생은 남학생의 목마를 타고 두 손으로 ‘정, 부통령 선거 다시 하라’ 푯말을 들고 서너 명의 부축을 받아 군중들 사이를 뛰어다녔다. 정오에는 서울시청과 국회의사당 앞에 십만여 명의 시민들이 구름처럼 모였다.
한 여중생이 우리를 향해 뛰어오며 소리쳤다.
-오빠! 오빠!
성원이가 그녀를 보고 놀라 소리쳤다.
-정혜야! 너는 왜 나왔어? 어서 집에 가!
-오빠! 우리 학교 여학생들도 다 나왔는데 나만 어떻게 집으로 가...
성원이 여동생 정혜가 달려와 나에게 매달리며 물었다.
-태훈 오빠! 나도 데모할 수 있지?
-그럼, 대한민국 국민이면 모두 나와 외쳐야지...
경찰은 철조망으로 바리게이트를 쳤다. 모자끈을 내려 턱에 걸고, 칼빈소총을 어깨에 둘러멘 채 곤봉을 들고 시위 학생들을 가로막고 경계했다. 소방차로 3차저지선까지 설치하고 시위대의 중앙청 진출을 막았다. 정오에는 시위 군중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고등학생들이 주도하던 거리행진은 대학생 형들이 나서면서 자연스럽게 시위주도권이 넘어갔다.
국회의사당 앞에서는 학생대표가 나서 3.15부정선거의 사례를 낱낱이 발표하였다.
자유당은 1948년부터 12년이나 대통령을 한 85세의 이승만을 또 다시 제4대 대통령으로 당선시켜 종신집권을 노렸다. 이승만은 사사오입을 강행한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최악의 부정선거를 저질렀다. 이승만정권의 친일파 무리들이 끝까지 살아남기 위해 상상할 수 없는 부정선거를 치러 이승만이 대통령에, 이기붕이 부통령에 당선되었다고 발표하였으나 3,15부정선거는 당연 무효이다. 자유당은 산업금융채권발행과 은행융자에 따르는 뇌물과 대기업으로부터 강제로 정치자금을 받았다. 그들은 내무부를 앞세워 첫째, 4할 사전투표를 하였다. 둘째, 3인조와 5인조 공개투표를 실시하였다. 셋째, 완장부대를 투표소에 배치해 공포투표를 실행하였다. 넷째, 야당참관인들을 갖은 방법으로 축출하였다. 그 결과 자유당의 부정선거는 투표결과에서 이승만과 이기붕이 득표한 표가 유권자의 수보다 더 많은 것으로 명백하게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러므로 3.15부정선거는 무효이며 다시 공명정대하게 선거를 실시하여야 한다.
학생대표의 부정선거 사례 발표는 성난 남녀학생들을 불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또한 마산상업고등학교에 합격해 마산 3.15부정선거 데모에 참여했던 17세 김주열 군이 행방불명된 후 4월11일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 앞바다에서 시신으로 떠올랐다는 학생들의 이야기는 또래의 고등학생들을 분노케 만들고 눈물을 흘리게 하였다.
12시30분경 학생대표가 외쳤다.
-경무대로 이승만과 면담하러 갑시다.
지켜보던 시민들이 박수로 학생들을 응원하고 나서고 시민들의 호응으로 학생들의 열기는 더욱 뜨거워졌다. 차성원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적극적으로 앞장서며 금방이라도 경무대로 달려갈 기세로 날뛰었다. 나는 미친 듯이 소리치며 우리 학교 학생들에게 모이라고 양손으로 불렀다. 각 학교는 깃발을 내걸고 학생들은 어깨동무하고 기관차처럼 달려나갈 기세였다. 시민들은 “잘한다! 잘해! 우리 학생들 잘한다!”를 연호하며 손바닥뼈가 부서져라 박수를 쳤다. 아이를 업은 아주머니들도 한복을 입고 머리에 수건을 두른 채 박수로 어린 학생들을 응원하고 정혜도 여학생 무리와 우리를 따라 행진했다.
시민들은 너나없이 한결같이 외쳤다.
-못 살겠다 갈아보자! 못 살겠다 갈아보자!
학생들은 시민들 구호에 맞춰 박차고 나가려고 야생마처럼 “영차! 영차!” “영차! 영차!” 구령을 맞추며 몸을 들썩이고 발을 구르며 뛰쳐나갈 준비를 하였다. 제자리에서 뛰기만 하여도 학생들의 구령에 1960년4월19일 화요일의 서울 하늘이 들썩였다.
학생들의 분노는 시위의 구호마저 바꾸어놓았다.
-자유당은 물러가라!
-이승만 물러나라!
-독재정권 타도하자!
일부 시민들은 미군용 GMC를 개조한 트럭을 몰고 와 차 위로 올라간 사람들이 수백 명이나 되었다. 마치 고슴도치가 가시를 세운 것처럼 사람들이 빽빽하게 올라탔다. 트럭 지붕 위에 올라탄 하얀 카라교복의 정혜는 태극기를 양손으로 흔들고 나는 긴 장대에 태극기를 매달아 흔들었다. 그런 트럭이 대여섯 대나 되었다. 성원이는 커다란 현수막을 펼쳐들었다. 광장에는 ‘밥 달라 우는 백성 악법으로 살릴쏘냐’ ‘민주주의 사수하자’ ‘민주주의 도살 원흉 가차 없이 색출하자’ ‘3.15 부정선거 무효이다’ 등 수 많은 현수막 구호가 펄럭였다.
12시30분 학생들이 어깨동무하거나 서로 팔짱을 끼고 뛰어나갔다. 가장 선두에서 성원이와 나는 우리 흥국고(현, 동대부고) 학생들을 이끌며 ‘동국대학교’ 빨간 깃발을 따랐다. 시위대는 홍수처럼 중앙청으로 향하고 정혜도 여학생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뛰었다. 의대생들이 흰 가운을 입고 행진해 확연하게 눈에 띄었다. 그들 현수막은 ‘학우들이여 메스를 들어라 썩은 정치 수술하자’로 독특했다. 서울 시민들은 학생 행렬의 길을 터주고 옆에서 함께 중앙청을 향해 행진했다. 시민과 학생들은 애국가와 군가 전우를 부르며 뛰었다.
겨레의 늠름한 아들로 태어나
조국을 지키는 보람찬 길에서
우리는 젊음을 함께 사르며
깨끗이 피고 질 무궁화꽃이다
함성과 아우성으로 노래의 가사는 분노처럼 터져 나왔다. 경찰들은 밀려오는 시위대를 향해 최루탄을 발사하며 필사적으로 막아섰다. 경찰은 곤봉으로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피를 흘리며 저항하는 학생들을 발로 짓밟아 연행했다. 맨 앞에서 어개동무를 하고 달리던 우리는 중앙청 앞에서 정면으로 경찰과 마주쳤다. 최루탄이 사방에서 터져 눈을 제대로 뜰 수도 없었다.
나는 어깨동무를 풀고 우리 학교 학생들을 불렀다.
-성원아! 성원아! 이리 이리!
경찰과 학생들이 뒤엉켜 누가 누군지 구분하기도 어려웠다. 시민들이 가득 탄 트럭이 질주했다. 경찰 대여섯이 달려오더니 차성원을 붙잡아 끌고 가려고 하고 성원이는 경찰들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뒷걸음치며 소리쳤다.
-태훈아! 태훈아! 구해줘!
나는 우리 학교 학생 수십 명과 최루탄 연기 속을 뚫고 달려가 성원이 교복을 붙잡았다. 경찰은 대여섯이고 우리는 십여 명이라 힘에서 밀리지 않았다. 하지만 경찰들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경찰은 성원이를 주동자로 생각하는지 연행하려고 기를 썼다. 경찰이 성원이를 끌어당기고 우리가 그를 붙잡고 버티면서 성원이 교복이 쭉 찢어져 나갔다. 검은 교복은 갈기갈기 찢어지고 흰 런닝이 드러났다. 나는 그의 팔을 잡고 악착같이 잡아당겼다. 땅바닥에 드러누운 성원이를 경찰들이 곤봉으로 두들겨 패며 마구 짓밟았다. 경찰들은 마구잡이로 곤봉을 휘둘러 온몸을 구타했다. 피가 터져 빨갛게 핏물 든 런닝이 쫙 찢어지며 성원이가 경찰들 손에서 벗어났다. 그가 벌떡 일어나 학생들 틈으로 뛰어들자 경찰은 학생 무리 사이로는 들어오지 못하였다. 하지만 여기저기서 경찰에 구타당해 피를 흘리자 학생들이 급격히 흥분했다. 분노한 시민들이 경찰을 향해 돌멩이를 던지기 시작하고 정혜와 여학생들이 벽돌을 가져와 길바닥에 깨트리며 악을 썼다. 성원이는 분이 불리지 않는지 최루탄이 날아오면 맨손으로 집어 들고 다시 경찰을 향해 던졌다. 정혜 발 앞으로 최루탄이 날아와 길바닥을 데굴데굴 굴러갔다. 나는 달려가 다시 집어 경찰을 향해 던지고 학생들도 경찰의 최루탄에 맞서 돌을 던졌다.
시민들은 도로의 보도블록과 경계석을 길바닥에 내동댕이쳐 깨트리고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돌멩이를 찾아 던졌다. 곤봉에 맞아 머리가 터진 성원이는 피가 줄줄 흐르는 것도 아랑곳 않고 경찰들을 향해 돌을 던졌다. 우리 학교 학생들은 용감하게 경찰과 싸웠다.
나는 두 손으로 커다란 태극기를 흔들며 외쳤다.
-학우들이여! 자유를 위해 싸우자!
나는 소리치며 눈물을 흘렸다. 학생들이 함께 외치면 눈물이 샘처럼 솟았다. 정혜와 여학생들도 나와 함께 외치며 고개가 하늘을 향하도록 소리쳤다. 최루탄가스가 입으로 코로 훅훅 들어와 맵고 쓰라려 눈물 콧물이 흘러,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시민과 하나된 학생들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경찰을 밀어붙이며 전진했다.
얼굴도 보이지 않는데 학생 대표가 최루탄 연기 속에서 외쳤다.
-자! 경무대로 갑시다.
성원이가 곧바로 다시 외쳤다.
-학우들이여! 경무대로 가자!
나도 무의식적으로 소리쳤다.
-경무대로 가자! 이승만을 만나러 가자!
학생과 시민들이 하나같이 경무대를 향하자 경찰들이 물러나기 시작했다. 흥분한 시민들이 경찰을 쫓아가며 돌팔매질을 하였다. 경찰이 빠르게 경무대 쪽으로 총을 들고 후퇴해 중앙청 후문의 소방차저지선 뒤까지 물러났다. 시위대와 경찰은 경복궁 담 옆 효자로에서 다시 대치했다. 시위대의 목표는 경무대이고 경찰은 경무대로 진출하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아내는 것이 임무였다. 서로 양보할 수없는 대치상황에서 경찰은 쉬지 않고 최루탄을 쏘아댔다. 국민들은 무상원조로 근근이 삶을 이어가는데 경찰은 무슨 돈이 그리도 많아, 최루탄을 겁나게 쏘아댄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최루탄 가스로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 가스연막 속에서 곤봉을 높이 들고 경찰들이 달려니와 시위대에 곤봉을 휘둘러댔다. 앞이 안 보이는 상황에서 순식간에 당한 경찰의 역습이라 학생들은 뒤로 도망치고 시위대도 흩어졌다. 최루탄 가스가 걷히자 도로에 피를 흘리며 쓰러진 학생과 시민 수십 명이 널브러져 있었다. 학생들이 모이고 시민들이 다시 효자로에 모여들었다.
흰 가운을 입은 의대생들이 부상자들의 피를 지혈하고 여럿이 팔다리를 들고 병원으로 후송하였다. 극도로 흥분한 시위대는 다시 경찰과 대치하고 함성은 커지고 시민들도 다시 급속히 늘어나고 학생들도 다시 구호를 외쳤다. ‘의에 죽고 참에 살자’는 중앙대 현수막이 뿌연 최루탄 가스 속에서 펄럭였다.
시민들이 구호를 외쳤다.
-민주주의 사수하자!
그때 차성원이 시위대를 향해 외쳤다.
-경찰의 소방차를 빼앗읍시다.
시위대가 함성을 지르며 저지선으로 도로를 막아놓은 소방차를 향해 달려갔다. 순식간에 소방차를 빼앗긴 경찰들이 놀라 도망치고 시위대는 대여섯 대의 소방차마다 가득 올라타 함성을 질렀다. 성원이가 먼저 소방차 위에서 대형 태극기를 흔들고 나도 옆 소방차로 뛰어올라 태극기를 양손으로 잡고 흔들었다. 정혜도 옆 소방차에 올라, 나와 눈이 마주치자 웃으며 태극기를 최대한 크게 흔들었다. 소방차들이 시민들을 콩나물처럼 싣고 천천히 경무대를 향해 전진했다.
경찰은 경무대 앞 100여 미터까지 후퇴해 다시 저지선을 형성하고 총구를 시민들에게 겨누고 있었다. 최루탄이 비둘기처럼 날아와 시위대는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소방차를 세우고 경찰과 대치하였다. 학생들이 다시 시위대의 선두로 나서며 경찰과 마주섰다.
경찰이 시위대 정면을 향해 총구를 겨누자 분위기가 살벌하게 변하였다. 하지만 학생들 기세는 꺾이지 않았으며 다시 어깨동무를 하고 경찰과 오십여 미터 거리를 두고 마주했다.
성원이가 나를 보고 소리쳤다.
-태훈아! 우리 저 하수관 굴리며 가자?
경복궁 담장 옆 도로에는 하수도공사용 대형하수관 대여섯가 있고 길이 5미터에 지름은 1미터 정도 되었다. 경찰의 저지선을 뚫을 최고의 무기였다.
나는 소리쳤다.
-학우들이여! 저기 하수관을 굴리며 갑시다.
학생들이 하수관 두 개를 도로로 끌어내 발로 굴리며 경찰을 향해 전진하였다. 경찰은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경무대를 방어할 마지막 저지선이었다.
우리는 정의롭게 구호를 외차며 전진했다.
-이승만 나와라! 이승만 나와라!
하수관에 가속도가 붙어 시위대의 전진이 점점 빨라졌다. 하지만 경찰들은 총을 겨누고 꼼작하지 않았다. 경찰과 불과 이십여 미터 앞까지 전진하는데 십분도 채 걸리지 않아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했다. 성원이는 주먹을 하늘 높이 치켜들며 구호를 외쳤다. 학생들은 너나없이 목청을 높이고 ‘민족 자주 정의’라고 급히 비뚤게 쓴 현수막이 나부꼈다.
나는 손목시계를 봤다. 시곗바늘이 1시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때 경찰이 수십 발의 최루탄을 발사하자 연막이 터져 바로 앞 경찰들조차 보이지 않았다. 눈물콧물 쏟아지는 쓰라린 연기 속에서 벼락같은 수백 발의 총소리가 들렸다. 시위대는 최루탄 발사 소리와 구별하지 못하였지만 나는 맨 앞에 있었으므로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시위대의 함성이 사라지고 학생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추어 섰다. 모두 손으로 입을 막고 최루탄 가스가 사라지길 기다렸다. 일분여가 밤새 어둠이 걷히는 것보다 길었다. 최루탄 가스가 서서히 사라지며 도로바닥이 드러났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총에 맞아 쓰러져 있었다.
순간 놀란 시위대가 정신을 차리고 악을 쓰며 앞다투어 뒤로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아수라장이 돼 학생과 시민들은 도망치고 나는 전봇대 뒤에 몸을 숨겼다. 정혜가 허리를 깊이 숙이고 다급히 따라와 내 교복을 잡고 매달리며 몸을 바짝 밀착하고 얼굴을 파묻었다. 나는 전봇대에서 머리를 조금 내밀고 경찰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서서쏴 자세로 도망가는 시위대를 향해 칼빈소총을 무차별 난사했다. 총구는 하늘이나 땅을 향하지 않고 사람들 심장 높이로 조준하고 총을 쏘아댔다. 총소리에 놀란 정혜 입에서 “엄마야! 엄마야!”소리가 터져 나왔다. 총알이 아슬아슬하게 “핑! 핑!” 소리를 내며 전봇대 옆을 스쳐가고 전봇대에 총알 박히는 소리에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나는 자동으로 최대한 몸을 홀쭉하게 만들어 전봇대 뒤에 바짝 붙으며 정혜를 끌어안았다.
정혜가 고개를 처박고 다급하게 물었다.
-우리 오빠는 어디 있어?
-어디로 안전하게 피했을 거야.
나는 총알이 빗발치는 순간에도 성원이를 찾았다. 전봇대마다 한 사람씩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러나 성원이는 보이지 않았다. 도로 위에 쓰러진 사람을 빠르게 살폈다. 쓰러진 사람들 맨 앞에 성원이가 도로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총성은 멈추지 않고 계속 들려와 나는 그를 향해 달려나갈 수가 없었다. 정혜는 내 교복에 얼굴을 묻고 “엉! 엉!” 소리 내 울었다.
파출소 건물이 불타고 도로의 자동차에서도 불길이 솟구쳐 시꺼먼 연기가 서울 하늘을 뒤덮었다. 경찰의 총소리가 멈추고 시위대는 눈에 잘 보이지 않을 만큼 물러나 있었다. 나는 성원이를 향해 달려갔다. 골목으로 피하였던 사람들이 도로로 슬금슬금 나와 쓰러진 사람들의 사지를 들고 차에 싣는 것이 보였다. 나는 엎드려 있는 성원이를 흔들었다. 그는 움직임이 없었다. 나는 도로 바닥에 흐르는 피를 손바닥으로 쓱 문질렀다. 뜨거운 피가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었다. 그는 도망치다 경찰이 쏜 총탄에 후두부를 맞고 쓰러져 있었다. 뜨거운 붉은 피가 멈추지 않고 흘러나왔다. 나는 총알구멍이 뚫린 성원이 목덜미를 태극기로 지혈하고 똑바로 눕혔다. 정혜가 달려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발을 동동 구르며 엉엉 울었다.
그는 가늘게 숨을 쉬고 있었다.
-성원아! 괜찮아?
-그래 인마 나 살아 있지?
-성원아, 목덜미에 총알이 박혔다.
-걱정 마라. 나 죽지 않을 거야.
-성원아! 우리 학생들이 잘 싸워 민주주의가 승리할 거야.
-반드시 새 날의 민주주의가 와야지...
성원이가 많은 피를 흘려 목숨이 위험해 보였다. 흥국고(현, 동대부고) 학생들이 성원이 팔 다리를 들고 나는 그의 머리를 받치고 달렸다. 정혜가 따라오며 성원이를 애타게 불렀다.
-오빠! 오빠! 죽으면 안 돼!
-정혜야! 걱정 마! 나 안 죽어. 혹시 나 죽으면 태훈이 오빠 말 잘 들어라.
-오빠! 절대로 죽지 마!
-응 안 죽어...
성원이를 들어올려 병원차에 실었다. 내 두 손은 피가 엉겨 손가락 사이로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병원차는 총상환자들을 가득 싣고 사이렌을 울리며 병원으로 달렸다. 울며 날뛰던 정혜가 내 다리를 보고 놀라 말했다.
-태훈오빠! 오빠도 총상 입은 거 아니야?
나는 왼쪽 다리를 내려다봤다. 허벅지 바깥쪽에서 피가 흘러나와 교복 바지를 찢고 상처를 살폈다. 총알이 박힌 듯 살이 둥글게 파여 찢어지고 피가 샘솟듯 뽀글뽀글 솟아났다. 나는 상처를 헝겊으로 칭칭 동여매고 정혜와 병원으로 달렸다. 하지만 성원이는 병원에 도착에 응급조치 중에 숨을 거두고 민주주의 불새가 돼 하늘로 날아간 다음이었다. 정혜가 흰 천을 걷어 성원이 시신을 확인하고 통곡하기 시작했다. 정혜의 울음은 서울 하늘에 길게 울려 퍼졌다.
나는 병원에 입원하라는 간호사를 뿌리치고 다시 거리로 뛰쳐나왔다. 서울신문사와 반공회관이 불타고 파출소들도 불탔다. 서울은 전쟁터와 같았다. 거리에는 여성들이 물동이를 이고 나와 시민들에게 물을 퍼주고 의대생들은 부상자들을 위해, 헌혈해 달라고 소리치며 다녔다. 여학생들은 헌혈을 하러 병원으로 달려가고 국민학생들도 거리를 뛰어다니며 구호를 외쳤다.
오후 3시에 전국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나는 다리를 절뚝거리며 서울거리를 친구들과 누볐다. 일부 시위대는 파출소에서 빼앗은 칼빈소총으로 무장하고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고 저녁이 되면서 종로와 을지로를 수십 대 트럭을 타고 돌아다니며 구호를 외쳤다. 시위대 트럭이 종로3가를 지날 때 동대문경찰서 경찰들이 시민 트럭에 총격을 가하자 시민들은 동대문운동장에서 경찰과 총격전을 벌였다. 경찰에 밀린 시위대는 청량리를 지나 고려대 뒷산으로 물러났다. 서울에서만 경찰의 발포로 100여 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을 당했다. 경찰도 3명이 사망했다.
나는 다리에서 피가 계속 흘러나와 상처의 헝겊이 굳어 가죽처럼 딱딱했다. 흐르는 피를 막기 위해 상처 헝겊 위에 다시 한 번 헝겊으로 동여매고 계속 걷고 뛰어다녀 상처의 피가 굳었다가 다시 흐르길 반복했다. 하지만 나는 성원이를 생각해서라도 시위를 멈출 수 없었다. 친구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정의로운 민주주의를 이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안암동 고려대 뒷산으로 물러난 시위대는 경찰과 총격전에서 사망한 학생의 장례식을 위해 고려대 교정으로 들어갔다. 정혜가 그곳에 있었다.
-정혜야! 어떻게 된 거야?
-병원에 군인들이 들어와 가족들을 모두 쫓아냈어. 오빠 장례식은 언제 할지도 모른대...
계엄군이 밤 10시에 서울 시내로 진주했다는 급보가 시위대에 전해졌다. 학생들은 공포에 떨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총격전을 준비했다. 그러나 학생들이 소지한 총은 이십여 자루에 불과해 계엄군과 전투를 한다면 이미 죽은 목숨과 다름없었다. 수백 명의 학생시위대가 고려대 강당에 모여 웅성거리고, 24시경에 계엄군이 고려대를 포위했다. 학생들은 숨을 죽이고 강당의 창문으로 계엄군이 포위망을 좁혀오는 것을 지켜보며 공포에 떨었다. 정혜는 내 옆에 바짝 붙어 흐느껴 울었다. 울음을 터트리는 대학생들도 있고 강당에는 중고등학생도 많았다. 나는 다리의 상처를 왼손으로 누르고 계엄군이 어둠 속에서 먹구름처럼 다가오는 것을 묵묵히 지켜봤다. 공포에 질려 두려움도 느끼지 못하고 멍하니 바라보니 계엄군의 검은 그림자만 저승사자들처럼 움직였다. 정혜의 흐느낌은 성원이 영혼을 부르는 소리 같아 내 눈에서 소나기처럼 눈물이 흘러나왔다. 나도 정혜를 껴안고 엉엉 소리 내 울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24시 정각에 세 명의 군인들이 강당을 향해 걸어왔다. 그들은 총을 들지 않은 비무장 상태로 강당에 들어와 먼저 민주영령에게 다가가 철모를 벗고 엄숙히 묵념했다. 계엄군 15사단장 겸 수도위수사령관 준장 조재미와 참모들이었다.
그는 먼저 조의를 표하고 학생들에게 약속했다.
우리 계엄군은 상관의 명령 없이 시위대에 무단으로 발포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민가의 건물에 무단으로 침입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민간인들에게 어떤 물품도 제공받지 않겠습니다. 그러므로 학생 여러분은 무기를 군에 반납하고 집으로 돌아가 공부에 전념하길 바랍니다.
장군의 근엄한 부탁에 학생들은 모두 그의 뜻을 따라 무기를 반납하고 해산해 그 시간부로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정혜와 병원으로 갔으나 군인들이 정문을 막고 접근도 허락하지 않았다. 사망자의 장례식 날짜는 정해진 것이 없다며 집으로 돌아가라고 총으로 위협했다.
나는 울기만 하는 정혜를 집에 바래다주고 집으로 돌아와 길고 긴 하루의 역사를 기억하며 깊은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에 눈을 뜨고 살아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온몸에서 최루탄 가스 냄새가 진동했다. 허벅지 상처는 다행히 상처를 동여맨 헝겊이 딱딱하게 굳어 지혈되어 있었다. 상처의 헝겊을 풀자 피딱지가 떨어지며 다시 피가 흘러나왔다. 쑤시고 절여 가루약을 상처에 뿌리고 다시 새 헝겊으로 상처를 동여맸다. 나는 다리를 절뚝이며 종로를 걸어 광화문으로 나갔다.
계엄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광화문에 진주해 시민들과 대치하였지만 곤봉을 휘두르거나 총을 쏘지는 않았다. 시민들과 계엄군은 공포 속에서도 대한민국 국민의 정을 느꼈다. 계엄군은 시위대를 진압하러 왔다기보다는 시위대를 보호하기 위해 온 군인들 같았다. 어느 순간부터 시민들은 군인들을 다정하게 대하고, 무서워 계엄군을 피해 도망갔던 시민들이 다시 광화문으로 모여들었다. 군인들은 단 한번도 곤봉이나 총개머리판을 휘두르지 않고 시민들과 가까이 대치하고 있었다. 물론 단 한 발의 총알을 쏘지도 않았다. 만약 군인들이 경찰처럼 무차별 발포를 하였다면 서울 시민 수만 명이 학살당하는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을 것이란 생각에 나는 수십 번 몸서리치며 고개를 저었다. 계엄군이 서울시내에 진주하면서 시위는 주춤했다.
대신 학생들은 거리곳곳에서 모금함을 들고 경찰의 발포로 사망한 열사의 위로금 모금과 부상자들 치료비 모금이 이루어졌다. 우리 학교 학생들도 종로5가에서 모금운동을 하였다. 나는 모금함 옆에서 목발을 짚고 서서 돈을 넣는 시민들에게 끝없이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한 사람이 모금함에 돈을 넣으면 학생 수십 명이 동시에 인사했다. 오후에는 정혜가 여중생들과 함께 나타나 모금함 앞에서 시민들에게 감사인사를 하며 눈물을 흘렸다.
정혜가 울먹이며 물었다.
-태훈오빠! 다리 총상 입은 상처는 괜찮아?
-응, 피도 멈추고 참을 만하다.
-상처 덧나면 죽을 수도 있다고 하던데...
-우리 오빠도 죽었는데 태훈이 오빠까지 죽으면 안 돼...
정혜는 모금운동을 하는 동안 내 곁을 떠나지 않고 걱정하며 내 다리 상처를 여러 번 내려다봤다. 나는 다리의 통증을 참으며 하루 종일 모금운동을 하고 집으로 왔다. 상처에서는 다시 피와 고름이 흘러나와 빨간약을 바르고, 가루약을 뿌리고 다시 동여맸다. 하지만 다리가 떨어져나가는 통증으로 한잠도 자지 못했다. 나는 엄마아빠와 병원으로 갔다. 의사는 총상환자들이 차고 넘쳐 위급환자가 아니면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간단한 치료만 받고 나오자 간호사가 내일 꼭 다시 와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나는 간호사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아빠도 시위에 참여한 것을 나무라지 않고 오히려 집안에서 민주 열사가 났다고 칭찬했다.
다음날도 상처에서 피고름이 흘러나왔다. 나는 병원에서 간단한 치료만 받고 민주 열사들 치료비 모금에 정혜와 함께 며칠을 참석했다. 정혜와 여학생들은 매일 종로에서 적극적으로 모금운동을 했다.
25일에는 서울 시민들이 깜짝 놀라는 일이 일어났다. 나라가 반쪽이 나도 시위는 하지 않는다는 대학교수들이 서울대 문리대 강당에서 시작해 종로를 걸어 국회의사당까지 한 시간 동안 거리행진을 하였다.
258명의 교수들이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 현수막을 들고 3.15부정선거와 4.19사건의 책임을 지고 이승만은 하야하라고 외쳤다. 수만 명의 시민들이 다시 거리로 나와 교수단 시위행렬을 따랐다. 나도 눈물을 흘리며 만세를 불렀다. 왼다리가 아파 빨리 걸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교수들과 수만 명의 시민과 학생들이 행진을 하는데도 경찰은 진압하지 않았다. 밤새도록 학생들의 시위가 계속되었지만 시위대와 계엄군, 경찰의 충돌은 없었다. 경찰과 계엄군은 이미 시민의 편이었다.
승리의 화요일
26일 화요일 아침 다섯시 통금이 해제되길 기다린 학생들이 광화문으로 몰려나왔다. 계엄군들이 광화문에 진을 치고 있었지만 일곱시경에는 삼만여 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계엄군은 완전무장한 채 총을 들고 탱크까지 앞세우고 있었다. 묘한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두려움을 모르는 국민학생이 탱크 위로 올라가 작은 태극기를 흔들며 외쳤다.
-대한민국 국군 만세!
다시 하얀 카라의 교복을 입은 정혜가 나타나 탱크 위로 올라가 만세를 불렀다. 그와 동시에 학생들이 탱크 위로 올라가 만세를 부르며 태극기를 흔들었다. 군인들의 저지가 없자 시민들도 탱크 위로 올라 대형 태극기를 흔들며 환호했다. 계엄군과 시민들이 하나돼 만세를 불렀다.
9시경에는 부정선거의 원흉 부통령 당선자 이기붕의 저택으로 학생들이 몰려갔다. 이기붕과 가족들은 도망가고 없었다. 시위대는 가전도구를 꺼내 도로에 쌓아놓고 불을 지르고 이기붕의 대형 승용차를 몰고나와 수십 명이 차 위로 올라가 구르며 뛰어 차를 마른 오징어처럼 납작하게 찌그러트렸다.
탑골공원에서는 이승만의 2m40cm 대형 동상이 크레인을 동원한 시위대에 의해 끌어내려 졌다. 시위대는 이승만 동상을 쇠줄에 묶어 종로거리를 끌고 다니며 이승만의 하야를 외쳤다. 나는 목발을 짚고 절뚝거리며 끌려가는 동상 뒤를 따르며 구호를 외쳤다. 정혜가 어깨동무로 나를 부축해 목이 터져라 함께 구호를 외치며 울먹였다.
-이승만 하야 하라! 이승만 하야 하라!
나는 차성원 몫까지 꼭 두 번을 외쳤다. 시위대는 다시 남산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시위대는 어마어마한 이승만의 남산 동상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승만의 80회 생일기념으로 세운 동상으로 세계에서 최대 규모인 높이 25미터에 달해 도저히 철거할 방법이 없었다. 시위대는 남산의 이승만 동상은 크레인으로도 철거할 수 없어 포기하고 남산을 내려왔다.
오전 10시경에는 십만여 명의 시위대가 광화문에 다시 모이고 국민학생들까지 현수막을 들고 나와 ‘부모형제에게 총부리를 대지 말라“고 소리쳤다. 아이들의 목소리가 가장 크게 광화문에 울려 퍼졌다. 시민 대표 다섯 명이 경무대 후원에서 이승만과 면담을 시작하자 경무대까지 우리의 목소리가 들리도록 나는 미친 듯이 외쳤다.
-이승만은 하야 하라!
-이승만은 하야 하라!
정혜가 악을 쓰며 외치고 시위대가 목청을 높여 나를 따라 외쳤다. 우리의 함성이 경무대 뒤 백악산에 메아리치도록 쉬지 않고 “이승만 하야!”를 외치고 외쳤다.
어느 순간 시민대표의 육성이 들려왔다.
시민 여러분! 늦었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를 결정했습니다. 민의는 승리했다. 학도는 승리했다. 시민들이여 기뻐하라! 학도들이여 기뻐하라! 시민 여러분 이제 탱크에서 내려와 각자 집으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10시 20분에 이승만이 국민의 뜻에 굴복하고 하야 발표를 하였다.
국민이 원하면 대통령을 사임하겠습니다. 3.15정부통령선거를 다시 하도록 지시하였고, 이기붕 의장은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도록 하였으며, 국민이 원하면 내각책임제로 개헌토록 하였습니다.
광화문 광장을 지키고 있던 계엄군 사단장 조재미 준장이 이승만의 하야 성명을 시민들 앞에서 다시 한 번 낭독하였다. 시민들은 하야 성명을 듣고 만세를 부르며 환호했다. 조재미 장군도 지프차에서 일어나 만세를 부르고 시민들과 함께 기뻐하였다.
그는 시민에게 총을 겨누라는 부당한 명령을 거부하고 군인의 본분인 국민을 보호한 진정한 참 군인이었다.
계엄군 탱크는 시민들을 가득 태우고 시민들과 함께 승리의 행진을 하고 비행기가 날아다니며 호외를 뿌려 이승만의 하야를 온 국민에게 알렸다. 학생들이 시작한 민주학생혁명의 승리였다. 나는 눈물이 한없이 흘러내렸다. 두루마기를 입은 노신사는 오른손에 지팡이를 들고 왼손에 중절모를 들고 광화문 한복판에서 탈춤을 추듯 덩실덩실 어깨춤을 췄다. 시민들은 하나같이 승리의 화요일을 가슴이 터지도록 기뻐했다. 오천년 한반도 역사에서 민주혁명은 처음이었다.
시민들은 이기붕 가족 넷이 경무대로 피신하였다고 떠들었다. 구호는 다시 거리질서 유지로 바뀌고 너도나도 청소에 나섰다. 계엄군도 청소를 시작하고 경찰들도 다시 나타나 시민들과 함께 거리 청소를 하고 질서유지를 위해 노력했다. 거리에는 ‘이승만 박사 만수무강 하라’ 표어가 나붙었다. 우리 민족은 뜨거운 정을 가진 혁명의 겨레였다.
나는 더 이상 허벅지가 마비되어 걸을 수조차 없었다. 정혜가 옆에서 부축했지만 통증을 참을 수 없어 기어서 병원으로 갔다. 의사는 상처의 붕대를 풀어보고 피고름을 짜며 딱 한마디했다.
-너무 늦었습니다.
-왜요?
-파상풍균이 온몸으로 퍼져 마비증상이 시작되었습니다.
-얼마나 살 수 있습니까?
-오늘 밤을 넘기기 힘듭니다.
-오빠! 국가는 국민을 국민은 국가를 지켜야 하는데...
정혜가 소리 내 울기 시작했다. 나는 대답도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간호사는 마지막으로 새로운 붕대를 감아주었다. 나는 정혜의 도움으로 집으로 돌아와 성원이를 생각하며 그가 흔들었던 피 묻은 태극기를 정혜에게 주었다.
어차피 나도 경무대 앞에서 죽을 목숨이었다. 전봇대가 일주일 더 살게 해줘 이승만의 하야 성명도 듣고 민주혁명이 성공한 것도 똑똑히 보고 들어 성원이보다 안타까움은 덜했다. 나는 민주혁명 동지에게 우리 혁명의 성공을 알리고 눈을 감고 싶었다.
피의 화요일 승리의 화요일
피의 화요일에 우리는 민주주의를 외쳤노라.
자유여 겨레를 자유롭게 하라.
민주여 국민이 권력을 갖게 하라.
정의여 독재에 분노케 하라.
승리의 화요일에 피운 민주주의여 영원하라.
온몸이 마비돼 돌처럼 굳어갔다. 나는 마지막 눈을 감으며 경무대에게 들리는 네 발의 총성을 들었다.
송주성 소설가
2014년 제1회 금샘문학상 대상. 작품 활동 시작
2018년 제6회 직지소설문학상 대상
2019년 제1회 무예소설문학상 최우수상
저서 장편소설 <직지 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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